산마르코 광장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카페 플로리안(Florian)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항상 관광객들로 붐빈다. 독일의 괴테, 영국의 바이런,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 카페의 이름을 빛냈지만, 여행 가이드가 유독 강조하는 이름이 있다.

"여기가 그 유명한 호색한(好色漢) 카사노바의 단골 카페입니다. 연애에 좋다고 해서 핫초코를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베네치아의 명물 카페 플로리안’. 1720년 문을 연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로 카사노바, 괴테, 나폴레옹이 이용한 명소다.

카사노바는 왜 이 카페를 자주 찾았을까? 카페 플로리안이 최초로 여성들에게도 입장을 허용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 이전만 해도 카페는 남성전용이었다.

18세기 베네치아는 그 이전의 진취적인 도전정신과 건강한 기운은 사라지고 점차 쾌락의 도시로 변해간다. 우후죽순으로 ‘리도토’라 부르는 도박장이 많이 생겼고, 카페 플로리안의 방에서도 은밀하게 도박을 벌이거나 매춘상대를 물색하던 사람들이 늘어나 당국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카사노바는 도박 단속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당국에 넘겼으며, 유럽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대화도 수집했다. 흔히 스파이라 말하는 역할이었다. 이처럼 카사노바는 의외에도 다채로운 페르소나와 인생배역의 소유자였다. 바람둥이의 이미지에 가리워진 그의 또 다른 면모를 살펴보자.

지아코모 카사노바의 초상화. 동생인 화가 프란체스코 카사노바의 작품이다. 185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에 훤칠한 이마의 매력적인 외모였으며 언변이 뛰어났다.

지아코모 카사노바가 연극배우를 부모로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것은 1725년이었다. 그의 엄마는 절세의 미인이었다고 하며 그의 친부는 돈 많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공연을 위해 언제나 집을 떠나있었던 엄마 대신 외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성장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최소 185센티미터 이상 되는 장신에 훤칠한 이마, 구릿빛 피부를 가진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12살의 나이에 명문 파도바 대학에 입학했으며 17살에는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보고 들은 것을 마치 사진 찍듯 기억하는 비상한 기억의 소유자였다. 베네치아 사람답게 5개 국어를 구사했다.

전공인 법학 이외에도 신학, 어학, 철학, 문학, 의학에 걸쳐 두루 공부한 만능 지식인이었다. 원래 그는 성직자가 되고 싶었으나, 외교관과 스파이로도 활동하였고, 뛰어난 수완의 사업가였으며 작가로서는 유려한 필치를 자랑하였다.

산 자카리아 선착장 부근에 있는 ‘탄식의 다리’. 카사노바는 이곳의 철통 같은 감옥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오랜 망명길에 오른다.

고위직 사제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던 카사노바의 운명을 바꾼 것은 남녀상열지사였다. 여성을 탐하였고 그것도 두 자매를 동시에 탐한 게 문제였다. 작은 도시국가 베네치아에 점점 소문이 돌더니 어느 날 밤 단속반이 들이닥친다.

죄명은 '문란한 사생활'. 결국 그는 '탄식의 다리' 옆에 있는 악명 높은 피온비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약 1년 6개월 동안 감옥 생활하던 도중 그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극적으로 탈옥에 성공한다. 훗날 그는 이렇게 당당하게 말했다.
"실수하지 않는 자는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미니정보] 베네치아에서 카사노바의 흔적 따라 걷기]

독일 뮌헨을 거쳐 파리로 망명을 떠난다. 18년동안 떠돌이 망명자 신세의 시작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당대 유럽인들 가운데 가장 많은 곳을 여행했던 사람이다. 로마까지 오로지 걸어서 여행한적도 있으며 유럽 대륙에서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나라는 없었으니까.

카사노바가 투옥되어 있던 피온비 감옥에서 지붕을 뚫고 탈출하는 장면을 그린 일러스트레이션.

파리에서 루이 15세를 만나 복권사업의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왕실 재건에도 힘을 쏟았던 것이나 비단에 인쇄를 새겨 넣어 인기를 끈 것은 사업가로서 그의 천재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망명생활에 지친 그는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와 8년동안 살지만 종교재판에서 다시 문제를 삼아 또 다시 추방된다. 이미 오랜 망명생활과 낭비벽으로 인해 빈털터리가 된 처지였다.

그는 보헤미아 지방에 있는 둑스(체코어로는 두흐초프) 성에서 독일 발트슈타인 백작의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 만 60살, 한국식으로 말하면 환갑의 나이였다. 카사노바 전문가인 벨기에의 정신분석가 리디아 플렘은 그녀의 저서 ‘카사노바 혹은 행복의 예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카사노바는 이가 빠진 노인이 되어 사회와 여인들로부터 격리된 채 성에서 일하던 하인들로부터도 놀림을 받던 처지였다. 그가 이제 사랑을 나눌 대상은 오직 프랑스어뿐이었다. 사랑과 계몽의 언어라는 바로 그 언어 말이다. 글쓰기는 인생 마지막 정복 대상이자 가장 아름다운 상대였다."

그렇게 하여 카사노바는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내 인생 이야기’라는 이름의 자서전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13년동안 글을 썼다. 빈털터리가 된 카사노바에게 글쓰기는 제일 좋은 치유제였다.

"나는 글을 쓰는데 하루 13시간을 바치고 있다. 그 13시간이 13분처럼 지나간다."

프랑스어로 쓰여진 카사노바의 자서전 원고 중 일부.

마침표를 찍은 뒤 1798년, 73세의 나이로 그는 눈을 감는다. 평생 122명의 여성들과 즐겼다고 하는 사생활을 너무도 솔직하게 털어놓은 게 화근이었을까? 사후에 출간된 자서전으로 인해 그에게는 난봉꾼의 굴레가 씌워지게 된다.

하지만 그 책에는 남녀상열지사 얘기보다 음식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나온다. 라이프스타일 묘사에도 매우 구체적이어서 18세기 후반의 유럽 풍속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꼽힐 정도다.

카사노바가 상대한 여성 대부분은 하룻밤 욕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랑이 식으면 헤어졌을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바람둥이는 아니었다. 죽을 때 그는 세상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카사노바다운 결말이다.

카사노바는 ‘밀당’의 천재였다. 밀당이란 남녀 관계에서 '밀고 당기는 연애의 기술'을 가리키는 말하고, 남녀 간의 미묘한 심리전을 의미한다. 소통과 커뮤니케이션, 협상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에 능했다는 뜻이다.

지적인 여성을 특히 좋아했던 카사노바는 마음에 드는 상대를 발견하면 질문을 던진 뒤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경청하기를 즐겼다. 언변이 좋았지만 듣는 능력도 탁월했다. 자서전에서 이런 명언도 남겼다.
"사랑의 4분의 3은 호기심이다."

카사노바가 환갑의 나이에 도착해 사망할 때까지 있었던 둑스(체코어로는 두흐초프) 성. 그는 이곳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내 인생 이야기’라는 이름의 자서전을 집필한다.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처럼 강력한 무기도 없다. 호감 가는 여성을 점 찍으면 현재 그녀에게 결핍된 ‘그 무엇’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알아냈다.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게끔 해줬다.

친절한 남자가 미녀를 얻는 법이다. 그것은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얻는 기술'이란 책에서 레일 라운즈는 이렇게 강조했다.
"사람은 무릇 자신의 매력을 잘 알아주는 사람에게 강하게 끌리는 법이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이성에게 작업하는 마음으로 사업도 해야 한다. 공짜는 없다. 무언가 얻고 싶다면 상대방을 정성껏 대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카사노바가 남기고 싶은 진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