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고(故) 박봉성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은 빈털터리 몸으로 자갈치 시장에 흘러든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렸다. 시장의 온갖 일을 하면서 어판장의 생리를 알게 되고 경매인으로 성장한다. 막대한 자본력을 갖춘 투기꾼들의 횡포에 대항해 어판장을 지키는 이야기다.

만화에 그려진 모습처럼 시장 상인들의 삶은 고되다.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새벽을 열면서 하루를 가장 먼저 시작한다. 세상은 잠들어 있지만 시장은 잠이 없는 것처럼 24시간 돌아간다.

마장동 축산물 시장

서울 성동구 마장동은 연간 약 200만명이 찾는 국내 최대 축산물 재래시장이다. 수도권 축산물 유통량의 70~80%를 차지하는 이 곳엔 1만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일한다.

마장동 도축장이 사라진 이후 충청도 등에서 도축된 고기들이 이 곳으로 반입돼 해체된다. 칼을 사용해 뼈를 발라내고 지방을 제거하는 발골(拔骨) 과정을 거친 후 당일 정육점으로 운반되는 유통과정을 거친다.

◇ 돼지열병 확산에 오히려 가격 하락...냉동창고로 향한 돼지고기

최근 마장동 축산시장은 아프리카돼지열병(ASF) 확산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때 폭등한 돼지고기 가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급락했다. 돼지열병이 사람에게 전염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심리적인 위축으로 수요가 줄어든 탓이다.

축산물품질평가원에 따르면 14일 기준 kg당 평균 돼지 가격은 3466원으로 지난달 18일(6201원)보다 44% 하락했다. 돼지고기의 냉장 유통 기한은 약 20일. 도축한 고기를 20일 안에 판매하지 못하면 냉동실에 넣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냉동창고는 한정돼 있고, 자금력이 없는 시장 상인은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돼지고기를 팔아야 돈이 도는데, 팔아야 할 고기들이 냉동고에 들어가니 자금이 회전되지 않아서다. 냉동창고를 빌리는 데도 꽤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돼지열병 사태가 장기화돼 고기가 오랫동안 팔리지 않으면 폐업이라는 최악의 상황도 올 수 있다.

구제역과 달리 돼지열병은 백신도 없고, 환경 생존력이 강해 재입식까지 최소 2년 이상 소요된다. 이 때문에 살처분한 돼지농가는 실질적 폐업을 할 수 밖에 없다.

수 년간 돼지를 키울수 없는 농가가 늘어나면 이 시장은 수입육이 대체하게 된다. 그동안 국산 돼지고기가 수입육 가격을 견제해 왔는데, 돼지열병이 장기화되면 견제가 힘들어져 수입육 가격 폭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 소비자는 바뀌는데 변화 거부하는 시장…"고기도 맞춤형 시대 올 것"

'마장동 30년 신화'로 불리는 최영일 가양식품 대표(51·사진)는 마장동의 또 다른 위기로 두 가지를 꼽았다. 변화를 거부한 시장과 현실과 동떨어진 규제다. 최 대표는 17세에 상경해 미싱사로 일하다 마장동에 입성했다. 지금은 이곳에서 300억원대 매출을 내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마장동의 가장 큰 위기는 소비자 트렌드가 급변하는데도, 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마장동 1세대는 대부분 시장 건물 임대주인데, 임대만 놓을 뿐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며 "시장 현대화를 위한 움직임이 있어도 이해관계 때문에 잘 이뤄지지 않고 소비자 편의시설이 늘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최근 소비자들 사이에서 가정간편식(HMR)이 인기를 끌면서 요리할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소량으로 사는 소비자들은 줄고 대량 HMR 생산 제조업체가 대형 유통업체와 거래를 하는 식으로 유통구조가 바뀐 셈이다. 축산 대기업과 직거래를 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마장동에서 제품을 조달하는 기회는 줄었다.

또 포장 단위도 소형화돼 1~2인 가구도 부담없이 고기를 살 수 있는 환경이 됐다. 배송료와 포장비를 감안하더라도 많이 사서 남기는 것보다는 소량으로 구매하는 소비자가 늘면서 마장동 시장은 외면받고 있다.

최 대표는 "소비자들의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마장동 시장도 그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며 "앞으로는 가정마다 고기를 선별해서 추천하고 배송해주는 컨시어지(
고객의 요구에 맞추어 모든 것을 일괄적으로 처리) 서비스가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맞춰 축산물 유통시장도 맞춤형 도소매 서비스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 현실과 동떨어진 정부 규제...마장동 떠나는 상인

마장동 시장 현실과 동떨어진 정부 규제도 위기의 또 다른 원인이다. 서울시는 작년 3월 조례를 개정해 식품제조가공업으로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인접도로와 12m 이상 거리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규정을 넣었다. 마장동에서 고기 발골·해체·포장을 하는 공장들은 별다른 축산물 기준이 없이 식품제조업 허가 기준을 적용받고 있다.

갑자기 바뀐 조례 때문에 기존 공장을 확장하려던 마장동 시장 상인들이 이 규정을 충족하지 못하고 지방으로 이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게 최 대표의 설명이다. 도체(屠體) 발골 과정에서 몸에 피가 묻을 수 밖에 없는데,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이를 고려하지 않아 식품안전관리인증(HACCP)을 받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는 "축산시장에 대한 정부의 규정 자체가 따로 없어 제조업 기준을 적용받고 있다"며 "제조업 허가를 받지 못하면 고기를 유통할 수 없기 때문에 경기도 구리로 공장을 이전할 예정"이라고 했다. 마장동 공장 대부분이 비슷한 처지라는 설명이다.

최 대표는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마장동 축산시장은 '기회의 땅'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그는 "마장동 시장은 여전히 학력, 신체조건을 불문하고 하고자 하는 열정 하나면 자신의 꿈을 펼치고 이룰 수 있는 곳"이라며 "현재의 위기를 잘 극복해야 한단계 도약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