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뜩이나 기업실적 악화로 세금이 덜 걷히고 있는데 정부는 내년 예산을 사상 최대인 513조5000억원으로 편성했다. 수입은 줄어드는데 지출을 늘리기 위해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하기로 하면서, 재정건전성에 비상이 걸렸다. 국민 한 사람이 갚아야 할 나랏빚도 급격히 늘어날 판이다. 1인당 국가채무는 작년 말 1313만원에서 2023년엔 2046만원으로 56%가량 증가한다. 전문가들은 "환란급 경제 위기도 아닌데 돈을 대폭 풀며 '페이고(Pay-Go·번 만큼 쓴다)'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

◇복지 지출 큰데 '법인세 쇼크'까지

재정건전성 악화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히는 것은 복지 지출의 가파른 증가다. 내년 예산안 가운데 일자리 예산을 포함한 범복지(보건·복지·노동) 예산이 20조6000억원 늘었는데, 이는 내년 전체 예산 증가분 43조9000억원의 절반에 육박하는 규모이다. 이 가운데 노인 일자리를 13만개 늘리고, 청년추가고용장려금을 신규로 9만명분 더 주고, 실업급여 단가를 평균 임금의 50%에서 60%로 10%포인트 올리는 등 내년 총선을 앞둔 선심성 예산도 크게 증가했다는 평가다. 특히 복지예산 증가 규모의 70%에 육박하는 13조8000억원은 지급 기준이 정해져 축소가 불가능한 경직성 지출이란 점에서 앞으로 재정에 큰 부담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

더욱이 그동안 잘 걷히던 세금이 내년에는 제대로 걷히지 않는다. 내년엔 법인세 수입이 올해(79조2501억원)보다 14조8309억원이나 감소한 64조4192억원에 그칠 전망이다. 올해 반도체 업황 부진 등의 여파가 내년 법인세에 큰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법인세를 포함한 내년도 전체 국세 수입도 올해보다 2조8000억원 줄어 292조원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세 수입이 감소하는 것은 10년 만이다.

수입은 줄어드는데 복지예산 등 뭉텅이 예산이 늘며 재정건전성 주요 척도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비율은 내년에 마이너스 3.6%에 달할 전망이다. 외환 위기 당시인 1998년(-4.7%), 1999년(-3.5%)과 글로벌 금융 위기 때인 2009년(-3.6%) 이후 처음으로 -3%를 깨는 것이다. 관리재정수지 비율은 2021년부터 2023년까지 -3.9%에 이른다는 게 정부 추정이다.

또 다른 재정건전성의 주요 지표인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내년에는 40%에 육박한다. 올해 37.1%에서 내년엔 39.8%로 2.7%포인트나 급등하는 것이다. 국가채무가 내년에 65조원 늘어나 805조5000억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동안 국가채무 비율의 마지노선을 40%로 정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 "적정 국가채무 비율 40%의 근거가 뭐냐"고 언급한 이후 사실상 마지노선을 허문 것으로 평가된다. 국가채무 비율은 2021년에 42.1%로 40%를 돌파한 뒤, 2022년 44.2%, 2023년 46.4% 등으로 급격히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홍남기 부총리는 "국가채무 비율 39.8%는 선진국과 비교해 결코 우려할 수준이 아니고, 굉장히 양호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미국과 일본의 채무 비율(2017년 기준)이 105.1%와 224.2%란 점을 감안하면 걱정할 수준이 아니란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공기관 부채까지 포함하면 국가채무 비율이 60%를 넘는 데다, 미국·일본과 같은 기축통화 사용국과 국가채무 수준을 맞비교하기는 무리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헌신짝 된 중기재정운용계획

정부가 5년치 국가 재정운용 전략을 제시하는 '국가재정운용계획'은 공수표에 가깝다는 비판도 나온다. 과거 정부는 이 계획을 바탕으로 재정을 운용했는데, 이번 정부는 매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크게 수정해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 첫해인 2017년에 쓰인 '2017~2021년' 계획에선 2020년 재정적자를 38조4000억원으로 계획했다가, 올해 내놓은 '2019~2023년' 계획에선 72조1000억원으로 거의 두 배 수준으로 늘려놨다. 또 지난해 중기재정운용계획에선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마이너스 3% 이내에서 관리하겠다'고 밝혔는데, 올해 중기재정운용계획에선 2020년부터 곧장 -3%를 초과하며 1년 만에 정부 스스로 약속을 깼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확대 재정이 필요하면 할 수 있지만, 재정이 늘어나는 속도가 너무 가파른 게 문제"라며 "세입 형편을 봐가면서 재정 규모를 고민해야 하고, 어느 분야에 재정을 늘릴지 지출 용도에 대해서도 심각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