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 설계(팹리스) 업체의 올해 상반기 매출은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반토막이 났다. 자율자동차·인공지능(AI)용 반도체 등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는 기대와 달리 아직 국내 수요가 적고, 해외에선 저가를 무기로 한 중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26일 국내 중소·중견 팹리스 업체 20개사의 올해 상반기 실적을 분석한 결과 매출은 1조2048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 1조544억원보다 14.26% 증가했다. 하지만 20개사 중 8개 업체가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을 낸 12개 업체도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하면 영업이익이 23.46% 줄었다.
20개사 중 8개 업체가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아나패스(123860)(-77억원), 앤씨앤(092600)(-72억원), 크로바하이텍(-33억원), 골드퍼시픽(-24억원), 알파홀딩스(-20억원), 아이에이(038880)(-15억원), 피델릭스(032580)(-11억원), 동운아나텍(094170)(-4억원) 등이다.
12개 업체가 흑자를 냈지만 이 중 5개 업체의 영업이익이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해 감소했다. 실리콘웍스, 에이디테크놀로지(200710), 아미노로직스(074430), 제주반도체(080220), 시너지이노베이션(048870)등이다.
업계 1위인 LG그룹 계열사 실리콘웍스의 영업이익은 올 상반기 80억원을 기록, 지난해 상반기(137억원)보다 41.6% 감소했다. 실리콘웍스는 디스플레이 패널을 구동하는 드라이버 구동칩 대부분을 LG디스플레이에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등 경쟁 업체와의 가격 경쟁으로 LG디스플레이의 실적이 악화됐고, 이 영향이 실리콘웍스에까지 미쳤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만 놓고 보면 에이디테크놀로지는 5% 감소한 38억원, 아미노로직스는 32.3% 감소한 16억원, 제주반도체는 83.2% 감소한 15억원, 시너지이노베이션은 61.1% 감소한 13억원을 기록했다.
국내 팹리스 업체들의 실적이 부진한 데는 국내 수요가 적기 때문이다. 삼성, LG 등 국내 전자업체를 뚫는다는 것 자체가 어렵지만, 거래를 한다고 해도 물량이 그리 많지 않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관계자는 "실리콘웍스 등 규모가 큰 회사를 제외하면 국내 팹리스 회사 중에 삼성, LG와 거래하는 기업은 별로 없다"며 "거래를 한다고 해도 최신 모델이 아닌 구형 모델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가 대부분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스마트폰 카메라용 자동초점 구동칩을 개발하는 동운아나텍은 삼성전자와 거래를 하고 있지만, 최신 스마트폰이 아닌 중저가 보급형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칩을 주로 공급하고 있다.
스마트폰, TV 등 전자제품 주기가 짧아지면서 연구개발(R&D) 비용이 커지고 있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업그레이드 된 신제품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개발해야 하는데, 국내 팹리스 업체가 이런 속도를 따라가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거액을 들여 제품을 개발했는데 공급 계약을 따내지 못했을 때의 리스크도 크다. 한 팹리스 업체 관계자는 "대기업의 경우 최소한 '2 밴더 체제'로 가는데, 제품을 개발했다가 공급 계약을 따내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손해는 고스란히 팹리스 업체가 떠 안는다"고 말했다.
저가를 무기로 한 중국 업체들과 경쟁하는 것도 벅찬 상황이다. 영상 보안 처리칩을 개발하는 앤씨앤은 매출 중 중국 비중이 90%에 달한다. 앤씨앤 관계자는 "고화질 CCTV(폐쇄회로TV) 카메라 등 하이엔드 제품이 아닌 중저가 시장에서 중국 현지 업체들과 가격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김수환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팹리스 업체들이 좁은 국내 시장에서 R&D 부담과 재무 악화 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며 "해외에선 중국 업체들과 치열한 가격 경쟁을 펼치며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