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들이 정성으로 키운 농작물을 소비자가 최상의 상태로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도 농부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에서 만난 박용순 아일랜드박스 대표가 내린 농부의 정의다. 그는 농림축산식품부(이하 농식품부)가 주최한 농식품 창업 경진대회에서 발표를 마치고 오랫만에 서울을 찾았다고 했다. 박 대표는 "아일랜드박스라는 브랜드로 우수한 품질의 제주산 감귤을 전국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제주도 농부"라고 소개했다.

‘농부가 아니라 농산물 유통업자 아니냐’라는 질문에 그는 "농사를 짓는 사람 뿐만 아니라 농산물을 유통하는 사람도 농부로 봐야한다"고 했다. 그는 웃으며 "농부니깐 농식품부가 주최한 행사에서 사례를 발표한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박용순 아일랜드박스 대표가 공동창업자 전진호씨와 배송 직전 마지막으로 감귤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박 대표는 몇 년전까지만 해도 농업과 인연이 전혀 없었다. 대전에서 태어나 청소년기 대부분을 전주와 광주광역시 등 지방 대도시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삼성전자와 노키아 등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에서 마케팅 전문가로 근무했다. 해외 근무도 많았다. 싱가포르에서만 10년 이상 살았다.

그는 2015년 아름다운 자연과 여유로운 삶에 반해 제주도로 정착지를 옮겼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글로벌 은행에서 외환 전문가로 일하던 아내는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했다. 그는 여러해를 두고 아내를 설득했고, 결국 아내도 그의 의견에 따랐다.

그는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제주도에서의 삶이 한동안은 그렇게 편할 수 없더니 어느날 문득 무작정 쉬는 게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한 때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민간 숙박 공유 플랫폼 ‘BnB 히어로’를 공동으로 창업해 운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회사를 정리했다.

스스로 농부라고 우기니 인정하겠다. 농업에 뛰어들게 된 이유는.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 제주의 전통 산업 분야인 농수산물에 글로벌 기업에서 주로 노하우를 쌓은 감성·경험·IT기술 등을 활용한 마케팅을 접목하면 지역 주민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사업도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잘 나가던 직장을 포기하고 제주도에 감귤유통을 하게 된 배경은.

"실은 직장에 올인(All In)해도 그 결과가 평생을 보장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다. 내 시간을 내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자율적인 생활도 원했다. 그래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창업을 생각했다. 그리고 실패도 경험했다.

하지만 뭔가 새로운 일을 다시해보고 싶었다. 대신 50대라는 나이를 감안해 좀 더 신중하게 실패확률이 낮은 창업 아이템을 고민했다.

감귤 유통사업은 감귤을 좋아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시작했다. 나는 부모님께 드릴 시지 않고 단 귤을 찾는 까다로운 고객이었다. 그러면서 과일 가게 주인과 친해졌다. 그는 품종별로 맛이 좋은 제철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맛 좋은 귤을 소개해줬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맛좋은 제철 과일을 생산하는 농민과 최고의 제품을 찾는 소비자를 연결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아이디어를 주변에 얘기했더니 반응이 좋았다. 크게 실패할 사업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고, 부담없이 사업을 시작했다."

아일랜드박스는 1년에 한번씩 제철을 맞은 감귤을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소비자에게 보내준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가.

"농부가 나무에서 다 익은 감귤을 수확하면 이를 사서 클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소비자에게 공급한다. 소비자가 사 먹는 대다수 과일은 덜 익었을 때 수확한다. 유통 과정에서 익는다. 이를 후숙(後熟)이라고 한다.

쉽게 설명하면 제주도 농부들은 감귤나무에서 다 익은 귤을 따서 먹지만 서울에 파는 과일은 유통되는 시간을 감안해 덜 익은 과일을 수확한다. 유통에 걸리는 시간이 짧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무에서 다 익은 과일과 유통과정에서 마저 익은 과일은 맛이 차이날 수밖에 없다."

클라우드 펀딩을 통해 소비자를 모으는 셈이다. 펀딩은 잘 되나.

"처음에 주변 사람들은 사업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소비자 반응은 괜찮았다. 펀딩을 할 때 최대 4000만원이 넘는 돈을 모으기도 했다. 지난해 겨울에 첫 펀딩을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5차 펀딩을 통해 모은 돈이 모두 1억5000만원쯤 된다. 펀딩에 참여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고객 평가 판매자 만족도’도 좋다. 5.0만점에 4.8 이상이다. 재구매율은 50%에 육박한다."

IT 분야의 마케팅 전문가에서 전통산업인 농산물을 유통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한국 기업인 삼성전자와 외국 기업인 노키아에서 근무하면서 국내외 IT 업계를 꽤 오랜시간 경험했다. 다이나믹한 IT 업계도 재미있었지만 이 분야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영역에서 창업한다면 더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 해보니 농수산물 유통도 IT와 동떨어진 게 아니더라. 기존 유통 서비스업에 인공 지능, 데이터 분석 같은 정보 기술과 감성적인 사용자 경험을 융합한 '스마트 농수산물 유통' 기업을 만드는 것이 아일랜드박스의 목표다."

아일랜드박스는 제주도 위미농협의 추천을 받은 농가에서 최상품 감귤을 공급받는다.

사업 성공의 관건은 질좋은 귤을 확보하는 일 같다. 과일을 구하는 방법은.

"제주에는 10종이 넘는 귤이 상품용으로 재배되고 품종별로 3~4 개월 이상 시장에 나온다. 그래서 계절과 관계없이 제주도 시장에 가면 항상 쉽게 귤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시장에 유통되는 귤 중에서 품종별로 가장 맛있는 제철은 대부분 1~2개월이다. 시기에 따라 맛있는 귤이 다른 셈이다. 제철에 먹는 귤이 가장 향이 좋고, 달고, 신맛이 적다.

그래서 우리는 레드향·천혜향·한라봉·귤로향 등을 품종별로 가장 잘 익는 시기에 맞춰 1년에 한 번 펀딩에 참여한 소비자에게만 공급한다.

서귀포 위미농협의 도움도 크게 받고 있다. 위미농협은 제주도 내 최대의 감귤 단위 농협으로 수확 전 수시로 농가를 찾아 감귤의 당도를 측정하는 등 품질을 관리해 준다. 그리고 감귤이 다 익을 때가 되면 우리 회사에 품질이 우수한 귤을 생산한 농가를 추천해 준다. 우리는 추천받은 농장을 방문해 농장 안의 위치별, 과일 크기별 샘플을 맛보고 가장 맛이 좋은 과일만 구매해 소비자에게 공급한다."

패키지도 세련됐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다. 그래서 소비자가 평범한 과일 상자가 아닌 선물 상자를 받아보는 신선한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박스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썼다. 무더운 여름철 뜨거운 택배 배송 차량에서도 과일이 신선하게 배송될 수 있도록 기능성을 고려했다. 보냉재로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삼다수를 얼려 사용하는데 반응이 좋다. 시중에서 파는 생수다. 녹은 물은 그냥 마셔도 된다."

아일랜드박스는 보냉재로 얼린 삼다수를 사용한다.

최고 품질의 과일이면 가격이 비쌀 것 같다. 많이 비싸진 않나.

"유통과정이 복잡해지면 단계별로 가격 거품이 많이 끼게 된다. 우리는 소비자와 생산자를 직접 이어주기 때문에 유통단계가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당연히 중간마진도 적다. 우리가 파는 최상급 귤의 경우 백화점에서 살 때보다 10%쯤 저렴하다. 우리는 농가에서 귤을 살 때 일반 수매 가격보다 10%쯤 더 준다. 우리가 챙기는 이문도 나쁘지 않다. 우리 몫은 판매금액의 10% 남짓이다. 우리도 좋고 생산자, 소비자도 좋다."

향후 계획은.

"현재 우리나라 농수산물 유통 시장은 소비자나 생산자보다 유통 업체의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소비자는 좋은 품질의 제철 상품을 구입할 기회가 많지 않고, 생산자는 수확한 상품의 품질이 아무리 좋아도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아일랜드박스 사업의 본질은 유통이지만 소비자가 제철에 좋은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생산자가 더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기존 유통시장에서 찾아볼 수 없던 선순환의 가치를 확산하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취급 품목과 지역도 확대할 계획이다. 1단계로는 제주도에서 많이 나는 겨울 당근이나 감자 등의 농산물을 비롯해 자리돔·옥돔·갈치 등의 생선을 취급할 생각이다.

제주도에서 나는 농수산물을 다양하게 취급한 이후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아일랜드박스가 전국 농산물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별로 관리하는 회사나 개인을 선정해 이들이 해당 지역에서 우리가 현재 하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릴 수는 있지만 성공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한다.

배송받은 잘익은 감귤은 서늘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는 것이 좋다.

감귤을 박스로 사면 상해 버리는 경우가 잦다. 감귤 관리법이나 조언해 달라.

"귤은 껍질이 손상되면 빠르게 물러지고 주변 귤까지 상한다. 그래서 소비자는 귤을 배송 받으면 바로 배송 과정에서 껍질이 손상된 귤을 모두 꺼내 먼저 먹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귤은 20도 이상에서는 상하기 쉽고 영상 1도 이하의 기온에 놓아두면 맛이 변할 수 있다. 서늘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는 것이 좋다. 특히 하우스 감귤은 다른 품종보다 보관성이 떨어지므로 배송받은 이후 가능한 빨리 냉장고에 넣어 보관해야 한다.

귤은 또 시간이 지나면서 신맛이 빠져 나가는 특성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정도의 신맛과 단맛이 조화를 이룰 때 비닐백에 넣어 냉장고 야채 보관함에 넣으면 꽤 오랫동안 입맛에 맞는 귤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