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흔히 ‘전자산업의 쌀’로 불린다. TV, 컴퓨터, 스마트폰, 자동차 등 다양한 분야와 제품에 폭 넓게 쓰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 등 미래 산업 분야도 마찬가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반도체 수요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반도체 중에서는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역시 IT(정보기술) 산업을 떠받치는 핵심 소재다. 메모리 반도체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곧바로 전세계 IT 산업이 타격을 받는다.

한국과 중국이 치열한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디스플레이도 마찬가지다. 특히 스마트폰용 OLED(유기발광다이오드)의 경우 삼성과 LG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89.5%에 이른다. 삼성의 OLED 생산 라인이 멈추면 애플의 아이폰을 비롯해 전세계 프리미엄폰 생산도 거의 중단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는 납득하기 힘든 폭투(暴投)이고 자충수다. 한국에 대해 감정이 상했다는 이유로 미국·중국·유럽 기업들에까지 피해를 주는 정책을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을까.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가서 눈 흘기는 식의 행태를 이해해줄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일본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공정에 들어가는 핵심 물질의 수출을 완전히 금지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수출 심사를 원칙대로 규정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노조의 ‘준법투쟁’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협박’만으로도 세계 IT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당연히 비상이고, 외국 기업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가 올 하반기 최대 불확실성 요인"이라고 밝혔다. TSMC는 파운드리 부문의 절대 강자이지만 삼성의 추격을 받고 있다. 삼성이 일본의 수출 규제로 주춤하면 TSMC가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TSMC는 한국산(産)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급이 줄어들면서 애플 아이폰, 델 PC 등의 생산이 차질을 빚는 데 따른 충격이 더 클 것으로 판단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에 대해 "근시안적이고 무모한 자해(自害)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 정부가 이런 부분까지 미리 살폈는지 의문이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다지만 전략적 판단은 미흡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경제의 ‘급소’를 찌를 생각만 했지 그 여파에 대해서는 별로 따지지 않은 듯하다. 글로벌 공급망(supply chain)과 가치 사슬(value chain)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이야기다.

1980년대 이후 세계화의 흐름으로 경제적 국경이 사라지고, 통신·운송 비용이 획기적으로 낮아지고, IT를 이용한 글로벌 생산 관리가 가능해지면서 생산 시스템이 매우 복잡해졌다. 예를 들어 애플의 아이폰에는 세계 40여개국에서 생산한 부품과 소재가 들어간다. 수십, 수백개 기업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글로벌 공급망은 세계화의 상징이자 핵심 매커니즘이다.

자연재해와 사고 등 여러 이유로 글로벌 공급망에 교란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일한 품질 수준의 부품·소재를 공급하는 다른 업체를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기업들은 비상사태에 대비해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몇몇 핵심 부품과 소재는 대체품을 찾기 힘들다. 이들 제품의 수급이 차질을 빚으면 공급망 전체가 작동을 멈춘다. 일종의 ‘뇌관’ 또는 ‘약한 고리’라고 할 수 있다. 불화수소와 포토 레지스트 등 일본이 수출 규제에 나선 화학제품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의 시장 점유율이 매우 높은 메모리 반도체 등도 비슷하다.

이번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는 글로벌 공급망의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왔다는 점에서 트럼프식 관세 폭탄 이상의 심각한 도발이다. 세계 경제 차원에서는 한국 스마트폰에 대해 수입 금지 조치를 취하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적대행위다. 보기 따라서는 세계 경제에 대한 자살 테러라고도 할 수 있다. 공급망의 무기화는 글로벌 생산시스템의 뿌리를 뒤흔드는 무분별하고 파괴적인 정책이다.

이 부분이 일본의 약점이다. 세계 경제에 가시적인 피해가 발생할 경우 모든 비난의 화살은 일본을 향할 것이다. 벌써부터 정치·외교로 풀어야 할 사안에 경제를 끌어들여 제3자에게도 피해를 주고, 자유무역의 원칙을 훼손하고 있는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금은 일본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 그게 칼날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청와대와 여당의 감정적인 대응이다. 국제 사회에서 우군(友軍)을 확보하고 일본을 압박할 전략을 짜기보다 국내에서 이적(利敵)과 친일(親日) 공세를 펴는 데 더 열을 올리는 모습이다. 의병과 죽창가를 거론하며 관제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데 여념이 없다. 속이 타들어가고 있는 기업들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장면이 많다.

정치·외교적 협상과 병행해 일본의 반(反)세계화 자충수의 허점을 파고 드는 전략이 나와야 한다. 반일(反日) 정서에 불을 붙이는 자극적이고 단세포적인 발언은 삼가해야 한다. 그런 식의 감정 분출은 사태 해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역효과만 낼 수 있다. 정파적 시각을 초월한 현실적이고 냉정한 대응으로 한국 경제의 활로를 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