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을 너무 자주 하는 후배를 따로 불러 ‘남들 하는 만큼만 하자’고 꾸짖은 적이 있어요. 앞으로 이런 말도 위법 행위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하는데 팀원들을 어떻게 이끌고 가야 하나 걱정이 됩니다." (IT 대기업 A사 팀장)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밤낮없이 현지에서 업무 지시를 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앞으로 주의하겠다며 사과를 했어요. 직장에서 후배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유통업체 B사 사원)

지난 16일 직장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된 첫날 많은 기업이 혼란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괴롭힘에 대한 판정 기준이 모호한 상황에서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 역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해 기업들이 난감해하고 있다.

기업들은 지위 또는 관계에서의 우위를 앞세워 직원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방지하자는 이 법의 취지에는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괴롭힘의 범위를 정량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업무 과정에서의 상식적인 지적이나 지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어 자칫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또 직원들 간의 소통도 단절돼 팀워크에도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으로 기업에서 부당한 지시나 강요가 줄어들고 서로를 존중하는 성숙한 분위기가 정착될 것이라며 환영한다는 반응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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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괴롭힘’ 기준에 업무 관련 지적도 조심…팀워크 저해 우려도

방위산업체인 C사의 차장급 직원은 "법 시행 후 사소한 농담조차 조심하게 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는 "친한 남자 후배에게 장난삼아 최근 살이 좀 붙은 것 같다고 말했다가 순간 속으로 ‘아차’했다"며 "앞으로 업무 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 게 상책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후배의 잦은 지각이 불만이라는 A사 팀장은 "고용노동부 가이드라인을 보니 상습적으로 지각하는 직원의 한 달치 출근 기록을 따로 확보해 지적하면 합법이라고 하더라"며 "예전에는 따끔한 말 한마디로 해결했던 문제를 이제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치밀하게 준비해 해결해야 하는 것이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국내 굴지의 자동차 업체인 D사의 부장은 "남성적인 기업 문화가 강해 상하관계 중심의 수직적 구조가 형성돼 있지만, 한편으로는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크다"며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으로 인해 특유의 기업 문화도 바뀔 것 같다"고 말했다.

광고대행사 E업체의 과장은 "과거에는 신입이나 경력직원이 들어오면 빨리 친해지기 위해 연애 등 업무 이외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며 "사적 대화도 나중에 꼬투리가 잡혀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자제하자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에서는 업무에만 집중하는 게 지극히 정상이긴 하지만, 갈수록 ‘사람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MBC 16·17사번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에 ‘직장 내 괴롭힘’ 진정서를 내고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중소기업은 더 큰 불만…"사정 열악해 문제 생기면 대응 어렵다"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규모가 큰 회사에 비해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천안에 있는 한 금속가공업체의 대표는 "다양한 기업 문화나 업무추진 방식까지 정부가 나서서 규제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을 보호하자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이로 인해 애꿎은 피해자들이 생기고 활발해야 할 조직 문화가 위축되는 부작용이 클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법무나 인사 관련 조직이 활성화된 대기업과 달리 열악한 중소기업은 새로운 법이 생겨도 이를 사전에 제대로 준비하기 어렵고 문제가 생길 경우 대응하는데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며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이 새로운 ‘중소기업 죽이기’가 되지 않도록 특히 신경을 써 달라"고 호소했다.

법이 시행돼도 제대로 신고나 조사가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부천에 있는 물류 관련 한 중소기업의 대표는 "대기업이야 조직이 크고 체계가 잘 갖춰져 있어 신고해도 직원을 잘 보호할 수 있겠지만, 소규모 중소기업에서 회사나 동료를 고소한 직원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법 시행 이후 ‘이래서 대기업에 가야 한다’는 한탄만 더 늘 수 있다"고 말했다.

◇"서로가 존중하는 성숙한 기업 문화" 기대하는 목소리도

반면 연차가 낮은 직원들 사이에서는 환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자동차 부품업체 F사의 대리급 직원은 "남성적인 문화가 강한 회사라는 것을 알고 입사했지만, 그동안 고압적인 상사의 지시나 연차별로 철저하게 분업화된 업무 방식 등에 적응하기 힘들었다"며 "법 시행 이후 조직 분위기가 한층 수평적으로 바뀌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연차가 높은 근로자들 가운데서도 이 법을 통해 국내 기업 문화가 전반적으로 한층 성숙해질 것이라며 기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유통업체 G사의 차장급 직원은 "이제 어린 후배들을 편하게 대하기보다 더 깊이 이해를 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며 "최근 과장급 이상 직원들 사이에서 ‘90년대생이 온다’라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