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이미륵과 안봉근, 그리고 정규화 교수의 아름다운 인연이 숨쉬는 뮌헨

여행이건 출장이건 뮌헨에 간다면 숙소로 가장 선호하는 지역은 슈바빙이다. 시차 때문에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면 아름다운 영국공원 산책이 기다리고 있고, 하루 일정이 끝난 뒤에는 뮌헨 대학 뒷골목의 개성 있는 카페에서 피로를 풀 수 있다.

슈바빙 뒷골목 서점. 대학가답게 위트와 반항의식이 넘치는 곳이다.

나만의 지식냉장고를 점검할 수 있는 서점과 도서관이 지천에 깔렸으며, 고전 회화관 알테 피나코텍에 가서 알브레히트 뒤러와 렘브란트의 초상화를 비교하는 시간도 즐겁다.

멀지 않은 호프브로이 하우스에 가서 흥겨운 브라스밴드 연주에 맞춰 소시지와 돼지 족발 안주에 마쓰(Maß)라 부르는 1리터짜리 큼직한 잔에 가득 담은 맥주를 즐겨보는 것도 뮌헨이 아니면 즐기기 어려운 낭만일 테니까.

하지만 슈바빙을 선호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오래 전 이곳을 무대로 살다간 한국인 작가의 활동무대인 까닭이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작가 이미륵, 그는 뮌헨 최초의 한인 유학생이었다. 지난주 소개한 전혜린보다 훨씬 앞서 뮌헨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1929~1934년에 내가 뮌헨에 있었는데, 그때는 한국사람으로서는 나와 이미륵 뿐이었습니다. 나는 이미륵에게서 독일어를 배웠고 우리 두 사람은 12시에 만나 대학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이미륵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뮌헨에 와서 공부를 하였으며 귀국 후 초대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재원 박사의 증언이다.

정면의 안경 쓴 인물이 이미륵, 그 오른쪽이 김재원 박사. 평생의 은인 자일러 박사의 집이다.

이미륵은 1928년 동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마쳤고, 김재원은 1929년 뮌헨대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자취도 함께 한 매우 가까운 사이다.

반면에 독일어로 쓰여진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한국어로 번역해 알린 사람은 전혜린이었다. 전혜린은 유학시절 여성 월간지 ‘여원’ 1959년 5월호에 ‘이미륵씨의 무덤을 찾아서’란 제목의 글을 통해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나는 조그마한 화환을 하나 들고 T와 또 나의 집 근방에 사는 S양과 함께 전차를 탔다. 몹시 추운 눈보라 치는 날이었다. 이미륵씨의 무덤은 시골 교회의 거친 들판 한가운데 있는 작은 공동 묘지 안에 있었다."

뮌헨 근교 그레펠핑에 있는 그의 묘비는 지금처럼 잘 정리된 것이 아니라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초라했다. 여기서 말하는 T는 전혜린이 뮌헨에서 만나 결혼한 헌법학자 김철수 서울법대 교수다.

그렇다면 S양은 누군가. 이미륵이 피서지에서 만나 친하게 지냈던, 미술과 도자기를 전공한 엘리자베트 샬크라는 독일여인이다. 이미륵은 지적인 외모와 기품 있는 언어 등으로 예술과 지식분야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관심과 인기를 누렸던 듯싶은데, 그녀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정규화 교수의 40년 이미륵 연구가 시작된 뮌헨 아말리엔 거리 65번지에 있는 고서점 ‘로버트 뵐플레’. 지금은 프란치스카 비어를로 이름이 바뀌었고 현판이 남아있다.

마치 안개 속을 배회하듯 감춰져 있던 이미륵의 신비한 삶은 한 명의 독문학자의 40년 집념 어린 노력 끝에 밝혀졌다. 정규화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한국외국어대학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뮌헨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1967년 뮌헨대학 뒷골목인 아말리엔 거리(Amalienstrasse) 65번지의 고서점 ‘뵐플레’(Robert Wölfle)를 방문했다가 운명의 전환점을 맞는다. 여주인 로테 뵐플레로부터 뜻밖의 질문을 듣게 되면서부터다.

"혹시 한국인 아니세요?"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신비한 이미륵 인생 탐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곳은 이미륵의 단골 서점이며, 여주인은 이미륵의 서예 제자였던 것이다.

이미륵(李彌勒)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하지만 원래 그는 이의경이란 이름으로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헤밍웨이와 같은 해다. 두 사람 모두 1920년대 유럽으로 떠난 것까지 같다.

다만 헤밍웨이가 파리를 거점으로 특파원과 종군기자를 거쳐 유명 작가가 되었던 것과 달리, 이미륵은 독립운동을 하다 뮌헨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한 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수려하고 지적인 용모로 인기를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였던 이미륵.

서울의대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19년, 이미륵의 운명을 바꾸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3.1운동이었다. 미륵은 전단을 인쇄하고 배포하는 비밀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수배인물로 지목되었다.

그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달아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스무 살,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의 일이다.

상해에서 그는 임시정부 산하 ‘청년단 편집원’과 ‘대한적십자회 십자대’ 회원으로 9개월 활동하는 동안 일본 고등경찰의 감시대상에 늘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독일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된 데는 두 사람의 영향과 도움이 컸다.

한 명은 고향이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봉근이었다. 그는 이미륵에 앞서 독일과 인연을 맺어 오면서 독일어, 영어, 일본어, 이탈리아어를 말할 줄 알던 인사였다.

[[미니정보] 안봉근과 초기의 독일유학생들]

이미륵은 결국 프랑스 여객선을 타고 마르세유로 가는데, 그의 여권에는 중국어 발음대로 Yiking Li(李儀景)’이란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중국 여권이었던 까닭이다.

유럽에서는 가톨릭 신부의 도움을 받아 1920년 5월 26일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하 수도원에 도착한다. 뷔르츠부르크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다가 건강이 나빠져 휴학한다.

뮌헨 대학으로 옮겨서는 동물학으로 전과하게 된다. 이후 1950년 숨질 때까지 30년 독일생활 대부분의 시기를 뮌헨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전혜린과 이미륵이 공부하고 글을 쓰던 바이에른 국립 도서관. 뮌헨 슈바빙 지역에 있다.

1928년 뮌헨대학에서 이학박사를 취득한 그는 안정적인 전공의 길을 걷지 않고 감성의 텃밭을 가꿔 홀연히 작가의 길을 고집한다.

글 쓰는 행위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대학과 도서관, 그리고 단골 서점에서 마련해준 일종의 문화강좌에서 독일인들에게 서예와 한문을 가르치면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다. 그때 이미륵으로부터 서예를 배우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뵐플러 서점의 여주인이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이미륵의 손길을 잡아준 사람이 알프레드 자일러 교수 부부였다. 자일러 교수는 고전 미술관 알테 피나코텍에서 근무하던 예술 학자였는데, 이미륵은 그의 부인 자일러 여사를 ‘엄마’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가족의 따스한 보살핌 덕분에 작품활동을 이어가던 이미륵은 마침내 1946년 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ßt)을 발표하고, 독일 교과서에 실리기에 이른다.

당시 독일의 평론가는 "외국인의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수려한 독일어"라고 평했으며, 독일 문학지는 "금년에 독일어로 발간된 서적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평생의 은인 자일러 박사 부부와 함께(왼쪽사진). 이미륵은 독일인들에게 서예와 한문지도로 용돈을 벌었다.

명성 덕분에 뮌헨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고, 온화한 동양정신과 지성미 넘치는 그의 풍모는 주변에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았다. 물론 여기에는 젊은 여성들도 있어서 그 중 일부는 이미륵의 애인으로 관계가 발전하였다.

특히 로자 마우러라는 영문학 전공 여성과는 결혼이야기가 오갈 정도였지만 그녀는 불치의 병으로 인연을 더 이상 잊지 못한다. 그녀가 숨진 3년 뒤 미륵도 1950년 3월 20일 위암으로 눈을 감는다.

그의 곁에는 독일엄마 자일러 부인과 또 한 명의 금발 여인이 있었다. 정규화 교수가 쓴 ‘이미륵 박사 찾아 40년’이란 책에는 이렇게 그려져 있다.

"조사 낭송이 끝난 후에도 에파는 비통한 표정으로 혼자 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관을 바라보고 있어서 옆에서 보는 추모객들의 마음을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 이미륵을 존경하는 어느 음악인이 바이올린으로 슈만의 꿈(Träumerei)을 구슬프게 연주하자, 장례식장이 더욱더 엄숙해졌다고 장지를 다녀온 사람들이 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에파는 이미륵의 임종을 끝까지 지켰던 네덜란드 계 독일여성 에파 크라프트 박사를 말한다. 그녀는 동양에서 온 작가를 흠모하던 제자이자 애인이었다.

이미륵의 임종을 지켰던 여인 에파 크라프트. 제자이자 애인이었다.

이처럼 이미륵이란 이름 속에는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 3.1운동, 압록강과 상해임시정부, 독일 바이마르 시대와 히틀러, 남과 북 등 현대사의 많은 사건이 녹아있다. 조혼 관습에 따라 11살 때 6세 연상인 부인과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었지만, 해방 뒤에도 그는 결국 귀국하지 않았다. 시대의 한계였다고 할까?

많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이미륵은 한국을 독일과 유럽에 알린 지식인이자 작가였다.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고향을 알린 사람이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을 때 용기 있게 낯선 세계로 나갔다. 훗날 많은 유럽 유학생과 주재원의 선구자였다.

1975년 독일에서 이미륵의 지인인 엘리자베스 샬크 자매와 인터뷰하는 정규화 교수.

한편 정규화 교수는 귀국 후 성신여대에서 자리를 잡은 후에도 평생 이미륵 박사 관련 자료수집을 놓지 않고, 탄생 100주년 행사와 여러 권의 저서에 이어 ‘이미륵 박사 찾아 40년’이란 책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2014년, 이미륵처럼 3월에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제 이미륵 관련 인사들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륵이 좋아했던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음악처럼 꿈결처럼 왔다가 꿈결처럼 그들은 떠났다. 아름답고도 진귀한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