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元祖)·원조(援助)·원조(援朝)… 세 가지 '원조'와 소련·중국·북한
6월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달이다. 관련해서 소련, 중국, 그리고 북한의 이야기를 원조(元祖), 원조(援助), 원조(援朝)라는 세 단어의 함의를 가지고 풀어본다.
소련은 사회주의의 '원조(元祖)' 국가이다. 영화나 예전의 스포츠 영상을 보면 소련 사람들이 가슴에 СССР라고 새겨진 옷을 입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러시아어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다. 그래서 '소련'이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세계 최대의 땅덩어리에 1922년 건국되어 1991년 붕괴되기까지 존재했다.
СССР중에서 첫글자 С는 소유즈(Союз). 연방이라는 뜻이다. 1922년 소련이 탄생할 때 러시아를 비롯하여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등이 연방을 구성했다. 두번째 글자 С는 소비에트(Советских).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권력 형태를 일컫는다. 세번째 글자 С는 사회주의(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공상적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일개 국가의 형태로 구현하고자 했다. 네번째 글자 Р는 레스푸블리까(Республик). 공화국이라는 뜻이다. 제정 러시아의 차르 체제는 무너졌고 소련은 공화국을 지향했다.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원조(援助)'했다. 중국의 공산당(중공∙中共)은 1921년 상하이에서 창당했다. 이후 중국 대륙을 놓고 국민당의 중화민국과 수십년을 겨뤘다. 그 사이 중국공산당은 중국 각지에 '소비에트'를 만들었다. 1949년에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싸움을 승리로 마무리하며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승인하고 10월 2일 국교를 맺었다. 참고로 북한은 1949년 10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맺었다.
1950년 2월, 모택동과 스탈린은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中苏友好同盟互助条约)'을 체결했다. 명목은 '상호원조'이지만 사실상 소련이 공산주의 중국을 일방적으로 지원해 주는 내용이었다. 이미 패전한 일본에 대해 앞으로도 소련과 중국이 공동으로 경계하자는 내용도 들어있다. 세계 평화를 같이 보위하자며 정치∙군사 동맹을 맺고, 소련이 중국에게 경제원조를 제공한다고 되어 있다.
공산주의 중국이 국가로 자리잡도록 소련이 원조하는 것은 156개 항목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석탄, 전력, 철강, 금속, 화공, 기계, 군수 분야 등에 걸쳐 있다. 관련된 개발의 대부분이 중국의 동북 3성 지역 그러니까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에 집중되었다. 동북 3성은 세월이 흐르며 다른 지역에 비해 쇠락하고 말았지만, 이렇듯 소련이 중국을 원조하던 시절에는 중화학 공업을 기반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섰다.
소련의 원조에 힘입어 중국은 1953년부터 제1차 5년계획을 시작했다. 주은래가 주도한 제1차 5년 계획은 중국의 공업화를 앞당기고 농업을 현대화하며 민생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경제계획이었다. 5년간의 1차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문제는 1958년부터 시작된 제2차 5년계획이었다. 1차 5년 계획의 성공에 고무된 모택동은 자신이 직접 2차 5년계획의 주도권을 틀어쥐었고, 이것을 자신이 구상한 '대약진 운동'과 결부시켜 중국을 경제 근대화로 이끈다고 했다.
이 때의 소련은 개인숭배와 철권통치의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문제를 지적하고 스탈린 격하에 나섰던 시기이다. 모택동은 소련의 이러한 움직임을 공산주의에 대한 심각한 수정주의라고 비판했다. 중국의 무기개발 관련 갈등도 있었다. 소련은 모택동의 중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중국에 가 있던 소련의 기술자들은 철수했다. 소련은 1962년 중국과 인도의 국경충돌이 일어나자 인도를 지원했다. 1969년에는 중국과 소련 사이에 국경충돌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소련의 원조 중단은 대약진 운동 실패의 큰 원인이다.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은 실패했다. 소련의 원조 중단과 함께 대약진 운동 자체가 갖고 있는 모택동식 급진, 좌경적 돌진 방식 역시 실패의 원인이다. 농업의 경우 노동력을 무모하게 운용한 결과 대대적인 수확 감소가 일어났고 대기근을 불러왔다. 모택동은 비판을 받았다. 대신해서 등소평과 유소기가 등판해 경제가 살아나자 모택동은 다시 이들을 숙청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이라는 극좌 권력투쟁을 일으켰다. 모택동은 어린 홍위병들을 동원했다.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맺었던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은 유명무실해졌고, 마침내 폐기되었다. 중국과 소련사이의 관계는 1989년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이 이루어진 후 비로소 회복되었다.
중국은 북한을 '원조(援朝)'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의 이야기이다. 이 때의 '원조'는 미국에 대항하고(항미∙抗美), 조선을 돕는다(원조∙援朝)는 의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6∙25 한국전쟁이 '항미원조 전쟁'이다. 이 전쟁을 중국에서는 '항미원조 운동'이라고 하기도 한다. 미국의 침략적 전쟁에 중국의 인민대중이 자발적으로 나서 싸웠고 조선이 미국을 격퇴하도록 지원(支援)하는 전 인민의 운동이었다는 취지이다. 한편 소련은 한국전쟁 당시 무기를 제공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전쟁에 '중공 인민군'이 참전했다고들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민 지원(志愿)군'이 참전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의 지원(志愿)은 자원입대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측 발표에 의하면 자원입대한 240만명은 중국 인민해방군 동북 변방군의 일부로 편성되어 1950년 10월 하순에 한반도로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전쟁에 마오쩌둥의 맏아들 마오안잉(毛岸英)도 참전해 전사했다.
중국은 지금도 10월 25일을 '항미원조 기념일'로 새긴다. 1950년 10월 19일에 한반도에 들어간 '인민 지원군'이 10월 25일에 국군과 조우하여 '초전의 대승'을 거두었다는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모택동은 축전을 보내 승전을 치하했다고 한다. 미국과 한국에 의해 중국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민지원군이 중국을 지켰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중국과 러시아는 긴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사회주의를 같이한 역사 등을 공유하는 특수한 관계이다. 위에서 원조(元祖), 원조(援助), 그리고 원조(援朝)라는 말의 함의를 가지고 중국과 러시아,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살펴 보았다. 우리는 한국 전쟁 이후 미국과 일본에 대한 관심과 교류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관심과 교류가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시장경제를 운위하는 러시아, 중국과 교역하며 상호 이익을 추구해 오고 있다. 시장이 협소한 한국으로서는 지역적으로도 붙어 있고 소비자의 규모도 큰 두 나라와의 경제적 거래에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또한 현대의 디지털 경제와 글로벌 교역이라는 두가지 테마만으로도 우리 젊은이들이 중국, 러시아 시장을 포함한 세계로 활동 범위를 넓힐 동인이 된다. 더구나 동북아의 정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될수록 육로로 연결된 경제권은 활성화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광의의 중국어권 시장과 러시아어권 시장도 함께 묶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 필자 오강돈은...
《중국시장과 소비자》(쌤앤파커스, 2013) 저자. (주)제일기획에 입사하여 하이트맥주, GM, CJ 국내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등 다수의 성공사례를 만들었다. 이후 디자인기업, IT투자기업 경영을 거쳐 제일기획에 재입사하여 삼성휴대폰 글로벌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프로젝트 등을 집행했고, 상하이/키예프 법인장을 지냈다. 화장품기업의 중국 생산 거점을 만들고 판매, 사업을 총괄했다. 한중마케팅(주)를 창립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졸업, 노스웨스턴대 연수, 상하이외대 매체전파학 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