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석 특파원

1989년 8월 24일 존 데이비스 폴란드 주재 미국 대사가 워싱턴 DC로 전문(電文)을 보냈다. 2차 대전 이후 폴란드에 처음으로 비(非)공산주의 정권이 탄생하게 됐다는 소식을 급하게 알렸다. 바르샤바에서 온 전문을 읽은 로런스 이글버거 당시 미 국무장관은 데이비스 대사에게 답신을 보냈다. "폴란드의 정치적 변화를 환영하오. 당신의 다음 임무는 폴란드가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게 도와 각 가정의 차고에 번듯한 자동차 한 대씩 세워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올해 폴란드는 이글버거의 소망을 실현하고 있다. EU(유럽연합) 28개 회원국의 경제 성장률이 2017년 2.4%에서 2018년 1.9%으로 고꾸라지는 사이 폴란드는 4.8%에서 5.1%로 고속 성장하면서 주변 국가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폴란드는 공산주의를 막 벗어던진 1989년에 인구 1000명당 자동차가 128대꼴이었지만, 지금은 독일·프랑스와 엇비슷한 1000명당 554대를 보유하고 있다. 1987년 폴란드에서 1년간 공부했던 폴리티코의 잔 시엔스키 선임 기자는 "석탄을 때는 퀴퀴한 냄새가 거리에 가득하고 생필품을 사느라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했던 폴란드가 창업가들을 길러내고 해외 자본이 넘치는 나라가 됐다"고 했다.

폴란드, 작년 5%대 경제성장 이뤄

올 초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의 폴란드 성장률을 3.5%로 예상했다. 지난해 5.1%라는 기록적인 성장률을 보여줬지만 올해는 유럽 전반의 경기 침체로 기세가 꺾일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IMF는 그러나 지난 4월 폴란드의 성장률 전망을 3.5%에서 3.8%로 끌어올렸다. 1분기(1~3월) 견고한 성장 추세가 확인되자 0.3%포인트 올린 것이다. 세계은행은 폴란드가 올해 4%의 성장을 달성할 것으로 내다본다.

폴란드 글리비체에 세워진 독일 자동차 업체 오펠의 생산 공장에서 직원이 차량을 조립하고 있다. 오펠 외에도 폴크스바겐, 볼보, 피아트 등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인건비가 저렴한 폴란드에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이런 성과는 일시적인 게 아니다. 동유럽 경쟁국과 비교해보면 폴란드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1989년 나란히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헝가리와 폴란드는 자주 비교된다. 30년간 폴란드의 경제 규모는 8.8배 커져 5.1배 성장한 헝가리보다 발전 속도가 빨랐다. 권창호 코트라 바르샤바무역관장은 "고층 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거리에 자동차가 늘어나는 속도가 빠르다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고 했다.

성장의 기복도 크지 않다. 폴란드는 1992년 이후 유럽에서 마이너스 성장이 없는 유일한 나라다. 글로벌 금융 위기로 유로존(유로 사용 19국)이 -4.5%의 성장률로 허우적대던 2009년에도 폴란드는 2.8% 성장을 이뤄냈다. 작년 폴란드의 실업률은 3.8%로 사실상 완전 고용이다. 2013년만 하더라도 실업률이 10.3%였지만 해외 투자가 물밀듯 들어오면서 빠른 속도로 실업률이 떨어졌다.

철저한 개방·친서방 경제 체제 구축

안제이 두다(왼쪽) 폴란드 대통령이 지난 12일(현지 시각) 미국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위해 만난 모습.

폴란드의 경제 발전은 철저한 친(親)시장주의를 추구한 것이 밑바탕이다. 공산주의 향수가 일부 남아 있던 다른 동유럽 국가와 달리 1990년 첫 민선 대통령이 된 레흐 바웬사 집권 시절부터 강력한 자유 시장주의를 채택하고 해외 자본 유치에 적극적이다. 폴란드투자청(PITA)이 지방자치단체와 외국 기업을 연결해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모든 주(州)가 해외 기업에 최소 25%, 최대 50% 규모로 법인세를 감면해주고 있고, 이런 세제 혜택을 최소 10년, 길게는 15년간 유지한다. 폴란드투자청에 따르면 2016년까지 폴란드에 들어온 외국인직접투자(FDI) 누적액은 1590억유로(약 212조원)에 달한다. 올해 영국의 글로벌 주가 정보업체 'FTSE 러셀'은 폴란드를 옛 공산주의 체제국 가운데 처음으로 신흥국에서 선진국으로 분류 그룹을 바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해외 투자자들이 폴란드를 서유럽 선진국과 거의 같은 수준의 시장으로 인식한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2004년 EU 회원국이 된 것도 기폭제가 됐다.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딘 동유럽을 위해 EU가 주는 지원금으로 폴란드는 2014년부터 7년간 825억유로(약 110조원)를 받는다. 이 돈을 공공 부문 투자에 쓰고 있어 재정을 쓰지 않고도 막대한 자금을 푸는 효과를 얻고 있다. 폴란드의 작년 경제 규모(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48.9%였다. EU(80%)나 유로존(85.1%) 평균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다.

유럽의 자동차 산업 허브로 각광

폴란드는 서유럽과 가깝고, 동유럽의 관문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하고 있다. 특히 서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독일로부터 과실을 얻고 있다. 독일 대기업들에 부품을 공급하는 중소기업들이 폴란드 경제의 기둥이 되고 있다. 서쪽이 동쪽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서고동저'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다.

폴란드는 시장 자체가 제법 크다는 것도 발전 동력이다. 3800만명의 인구는 동유럽에서 제일 많고, 28개 EU 회원국 중에서도 여섯째로 많다. 폴란드투자청은 "대학생이 130여 만명에 달해 동유럽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젊은 인구가 가장 많을뿐더러 중소 도시에서도 영어 소통이 원활하다"고 소개한다. 인적 자원의 수준이 높으면서도 인건비는 저렴하기 때문에 투자처로서 매력이 있다. 폴란드의 시간당 인건비(2016년 기준)는 8.6유로다. EU(25.4유로)의 3분의 1, 이웃 나라 독일(33유로)의 4분의 1 수준이다.

폴란드는 요즘 유럽의 자동차산업 허브로 각광받고 있다. 폴크스바겐, 볼보, 피아트, 오펠 등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이 대거 생산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지난해엔 메르세데스 벤츠가 폴란드 서부 야보르에 5억유로(약 6676억원)를 들여 엔진 공장을 완공했다. 자동차 공장이 집적돼 있다 보니 전기차 시대를 맞아 자동차용 배터리 공장도 몰려들어 시너지 효과를 얻고 있다. LG화학이 유럽의 거점 배터리 공장을 폴란드에 짓고 작년부터 가동에 들어간 게 대표 사례다.

마신 피아트코프스키 세계은행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폴란드 경제를 분석한 '유럽의 성장률 챔피언'이란 책에서 "폴란드는 2차 대전 이후 서독이 해외 투자를 유치하고 인력 수준을 높였던 발전 방식과 흡사한 전략을 쓰면서 유럽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