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를 많이 쓸수록 비싼 전기요금이 부과되는 전기요금 누진제가 완화돼 올여름 소비자들의 전기요금 부담이 줄어들 전망이다. 반면, 누진제 완화에 따른 손실은 한국전력이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으로 적자가 누적된 한전은 전기요금 인상을 기대했지만, 정부는 오히려 전기요금의 인하 카드를 꺼내듦으로써 한전 부실이 심화될 상황에 처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전은 3일 '전기요금 누진제 TF'가 마련한 누진제 개편안 토론회를 갖고, 누진제 완화 또는 폐지 등 3개 안(案)을 발표했다. 누진제 TF(태스크포스)가 제시한 안은 ▲현행 3단계 누진제 구조를 유지하되 지난해처럼 7~8월 두 달간만 누진 구간을 확대하는 방안 ▲7~8월 두 달간만 현행 3단계 누진제를 2단계로 줄이는 방안 ▲연중 단일 요금제로 변경해 누진제를 폐지하는 방안 등 3개 안이다.

산업부는 누진제가 완화, 또는 폐지될 경우 한전의 부담은 최대 2985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해에도 한전은 한시적 누진제 완화로 3587억원의 부담을 떠안았다. 당시 정부는 소요 재원 일부를 부담하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한전이 모든 부담을 졌다. 이날 토론회에서도 정부는 누진제 완화에 따른 한전 부담 해소 방안에 대해서는 명확한 안을 내놓지 않았다.

한전은 분기마다 수조원대 영업이익을 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이후 적자 행진이 계속되면서 순식간에 '부실기업'으로 전락했다. 발전사로부터 전기를 과거보다 비싸게 사들이는데 판매 요금(전기요금)은 그대로 받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김종갑 한전 사장도 "두부값(전기료)이 콩값(연료비)보다 싸졌다"며 왜곡된 전기요금 현실화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날 정부가 내놓은 전기요금 개편안은 여름철마다 "요금 폭탄 걱정에 에어컨도 못 켠다"는 국민 불만 잠재우기에만 급급했고, 이에 필요한 재원도 한전에 모두 떠넘겼다. 그러자 권기보 한전 영업본부장은 이날 전문가 토론회에서 "한전은 뉴욕증시 상장기업이다. 공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뿐 아니라 주주(株主) 이익도 대변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있다"며 누진제 완화 부담을 한전에 떠넘기는 데 대해 반발했다. 권 본부장은 "경영 상황이 계속 좋지 않은데 누진제 완화로 한전이 추가 부담을 져야 하는 것에 이사진도 부정적인 입장"이라고도 했다. 한전은 올 1분기(1~3월)에만 6299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정부, 누진제 완화·폐지 '생색'… 한전 적자엔 눈감아

반년 가까이 논의해온 누진제 TF(태스크포스)가 이날 제안한 3가지 안 중 '누진 구간 확대안'은 7~8월에 한해 누진제 구간을 늘리자는 안이다. 1단계 구간을 300kWh까지 늘리고 2단계 구간은 300~450kWh로, 3단계 구간을 450kWh 초과로 늘리는 것이다. 1629만 가구가 가구당 월 1만142원의 혜택을 받게 된다.

'누진 단계 축소안'은 7~8월만 누진 3단계를 폐지하고 2단계로 축소하는 방안이다. 609만 가구가 월 1만7864원을 할인받게 된다. '누진제 폐지안'은 연중 kWh당 125.5원의 단일 요금제로 변경하는 안이다. 887만 가구가 월 9951원의 전기요금 할인 혜택을 받게 된다. 누진제 폐지안의 문제점은 전기 사용량이 적은 1416만 가구의 전기요금이 월 4335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날 토론자로 나선 박호정 고려대 교수는 "누진제 폐지안은 현실성이 없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정부가 작년 여름 폭염 때와 마찬가지로 여름철 '누진 구간 확대안'을 채택할 것으로 예상한다. 가장 많은 가구에 할인 혜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경우든 한전의 부담이 최소 961억원에서 많게는 2985억원까지 늘게 된다는 점이다. 지난해 7~8월 한시적 누진제 완화로 한전이 떠안은 부담은 3587억원이다. 당시 정부는 이 중 일부를 부담하겠다고 했지만, 국회 심의 과정에서 무산돼 결국 한전에 모든 부담을 떠안겼다.

한전은 현재 월 200kWh 이하 사용자에게 최대 4000원을 할인해 주는 '필수사용량보장공제' 폐지를 기대했지만 이번 TF에선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고소득 가구까지 혜택받는 불합리한 제도이지만 내년 총선을 앞두고 그동안 혜택을 받아온 958만 가구의 반발을 의식한 탓이다.

◇"선심성 정책은 그만… 탈원전에 따른 전기료 인상 인정해야"

이수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정부 정책으로 한전 경영이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적 배려 계층이 아닌데도 누진제 혜택을 받는 가구가 있는데, 이는 타당하지 않다"며 "정치적인 고려를 하지 않는다면, 효율이나 분배 차원에서 전혀 타당하지 않은 누진제는 폐지돼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앞서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은 작년 8월 "누진제를 손봐서(폐지해서) 1400만 가구의 전기요금이 오른다고 하면 가만히 있겠느냐"며 "굉장히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성윤모 산업부 장관도 지난달 20일 "한전 적자로 인한 전기요금 인상은 없다"고 말했다. "탈원전에도 전기요금 인상이 없다"고 주장해온 정부가 시장논리보다 정치논리를 앞세우고 있다는 점을 자인(自認)한 셈이다.

김삼화 바른미래당 의원은 "국민에게 탈원전 정책에 따른 전기요금 인상 가능성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고 탈원전과 전기요금 문제를 공론화해 국민의 의견을 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