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문화다. 질병이 아니다."

게임 업계 종사자와 일부 시민들이 최근 소셜관계망서비스(SNS) 프로필 사진으로 올린 문구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5일(현지 시각) 게임중독을 질병에 포함하기로 결정하자 일종의 SNS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한국게임산업협회 등 89개 단체는 ‘게임 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도 구성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장에 ‘근조, 게임 문화 게임 산업’이란 문구의 검은 현수막을 내걸고 애도사까지 낭독했다. 게임 산업이 죽게 됐다는 거다.

이들이 극렬히 반대하는 이유는 뭘까. 게임업계 안팎에선 그동안 쌓인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분석한다. 정부가 게임을 일종의 악으로 보고 지나치게 개인의 자유를 억제해왔다는 것이다. 밤 12시가 되면 청소년의 게임 이용을 원천 차단하는 ‘셧다운제도’, PC 온라인 게임 월 50만원 결제 제한 등이 대표적인 예다. 여기에 김강립 보건복지부 차관이 WHO의 결정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기름을 부었다.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보느냐 마느냐는 ‘게임 업계의 밥그릇 걱정’ 정도로 치부할 사안이 아니다. 무엇보다 WHO의 결정이 그다지 객관적이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이번 결정의 핵심은 게임 행위에 대한 중독 증상을 병으로 보겠다는 것인데, 이 논리를 적용하면 극단적인 쇼핑중독, 일중독, SNS중독 등 다른 행동 중독도 질병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WHO는 게임 중독 기준을 ‘욕구를 참지 못하고, 일상생활보다 우선시하며 삶에 문제가 생겨도 중단하지 못하는 증상이 12개월 이상 지속되는 경우’로 제시했다. 이 기준 역시 유튜브 중독, 페이스북 중독, 낚시 중독 등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다. 왜 게임만 질병이 되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다.

알코올 중독의 경우 알코올 성분이 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인과 관계가 입증됐지만, 게임중독의 경우 정확한 인과관계도 증명되지 않았다. 게임 중독에 빠지는 이유가 게임 때문인지, 개인의 성격·환경 등 다른 요인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다. 학계의 반박도 제기된다. 크리스토퍼 퍼거슨 미국 스테트슨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공부 스트레스가 많고 부모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게임에 중독되는 학생이 많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게임 자체를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혹자는 심각한 게임 중독 증상만 질병으로 규정하는 건데 왜 호들갑이냐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게임은 우리 국민 3분의 2가 즐기는 문화 활동이다. 국내에 관련 법이 제정되는 등 포괄적 규제가 발동하면 일상적인 수준에서 게임을 즐기는 이용자들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보건복지부는 WHO의 결정이 권고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로 국내에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게임에 관한 부정적 인식 확산도 불가피하다. 부모들의 공포심을 자극해 "너 그러다 게임중독된다. 그거 병이야"라고 잔소리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2017년 기준 우리나라의 게임 수출액은 6조7000억원으로 K팝의 10배, 한국 영화의 100배에 해당한다. 전체 게임 매출 규모는 13조원, 세계 시장 점유율은 4위다. 황금종려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인 봉준호 감독 못 않게 한국의 우수한 게임 개발자들, 세계 최대 e스포츠 대회에서 우승한 한국 게이머들은 칭송받을 자격이 있다. 부디 성급하게 게임 질병코드를 도입해 게임 문화와 산업을 망가뜨리는 우를 범하지 말길 바란다. WHO의 권고는 권고로 받아들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