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과 중국의 무역 협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인공지능(AI)의 추천 비율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지난 31일 오후 기자의 스마트폰에 '딩동' 하며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기자가 맡긴 돈을 굴리는 로보 어드바이저(Robo Advisor) 애플리케이션(앱)에서 보내온 알람이었다. 같이 온 메시지는 "앞으로 중국 비중을 줄이고 달러와 신흥국 대표지수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고 돼 있었다. 인공지능이 요즘 시장 상황을 읽고 고객이나 인간 펀드 매니저 대신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 로보 어드바이저는 '로봇'과 '자문 전문가'를 합친 말로, 전통적인 펀드 매니저 대신 AI가 투자자에게 적합한 자산 관리 서비스를 해주는 서비스다.

디지털 기술 발전에 따라 은행부터 보험, 증권, 자산운용 업계까지 AI 바람이 불고 있다. 로보 어드바이저뿐 아니라 AI 은행원, AI 상담사도 등장하고 있다. 그간 이런 발전을 가로막던 규제 장벽도 하나둘 낮아지고 있다. 덕분에 고객은 싼 가격에 AI가 골라주는 '맞춤형 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됐다.

◇AI가 맞춤형으로 돈 굴려준다

우리나라에 AI를 활용한 로보 어드바이저 서비스는 지난 2016년 도입돼 은행, 증권사 등에서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단순한 자문 역할에 그쳤다. 로보 어드바이저가 자문하지만, 사람이 일일이 금융 상품에 가입하거나 투자 지시를 해야 했다. 로보 어드바이저에게 투자를 알아서 해 달라는 '일임 계약'을 맺고 맞춤형 서비스를 받으려 해도 일임 계약은 반드시 사람을 만나 설명을 들어야 했기 때문에 사람이 아닌 AI 로봇과 계약을 맺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최근 규제가 풀리면서 비대면으로 일임 계약을 하고, 스마트폰 앱 등을 통해 증권사 계좌에 든 돈을 AI가 알아서 굴려달라고 할 수 있게 됐다. 이에 우선 지난달 로보어드바이저 전문 업체 디셈버앤컴퍼니자산운용이 스마트폰 앱 '핀트'를, 쿼터백자산운용이 '쿼터백'을 각각 출시했다.

기자는 지난 24일 이 중 '핀트'에 최소 투자 금액(20만원)을 넣어봤다. 고객이 할 일은 선진국 주식과 신흥국 주식, 채권 등 자산군별 투자 비중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다음엔 별로 할 게 없다. 투자 성향을 '보통'(10단계 가운데 5단계)으로 설정하자 AI는 미국 우량 단기채로 구성된 ETF(상장지수펀드)에 69%, 미국의 전기·가스 등 유틸리티 기업 ETF에 31%를 투자했다. 어떻게 돈을 굴리는지는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로보 어드바이저의 장점은 맞춤형 포트폴리오를 짤 수 있다는 것이다. 투자자가 시장에 발 빠르게 대응할지, 아니면 신중하게 접근할지, 한국 기업을 특별히 선호하는지 등을 AI 로봇에게 알려주고 그에 맞춰 투자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여태껏 고객 입맛에 맞춰 주는 일임 계약은 수수료가 많고 진입 장벽(최소 투자금액)도 높았다. 그런데 로보 어드바이저는 사람 손이 안 가니 수수료는 적다. 최소 투자금액도 얼마 안 된다. 예컨대 핀트는 20만원, 쿼터백은 50만원이다. 정인영 디셈버자산운용 대표는 "여태껏 개인 투자자는 기성복을 입거나 고액을 내고 맞춤옷을 입어야 했는데, 로보 어드바이저의 등장으로 소액 투자자도 저렴하게 맞춤옷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

로보 어드바이저 시장은 빠르게 성장할 전망이다. 이달부턴 개인도 자기만의 알고리즘을 짜 로보 어드바이저 테스트베드(시험장)에 참여할 수 있다. 다음 달부턴 일임 계약뿐 아니라 펀드도 로보 어드바이저가 직접 굴릴 수 있게 된다. 지금껏 로보 어드바이저 펀드는 AI 자문 내용을 바탕으로 펀드 매니저가 운용했다. 펀드 매니저 인건비를 줄이는 만큼 고객 수수료를 낮출 수 있게 된 것이다. KEB하나은행 하이로보센터는 국내 로보 어드바이저 시장 규모가 올해 2조원에서 2025년엔 30조원으로 불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은행원 대신 AI가 고객 상담

전문가들은 앞으로 금융 업계에서 상당수 단순 업무는 AI 기술을 활용한 로봇에 돌아갈 것으로 내다본다. 현재 국내 금융사들은 AI 은행원, AI 상담사들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현대카드가 IBM 왓슨과 손잡고 낸 AI 활용 ARS 기능은 전국 각지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의 음성 샘플을 학습했다. 고객이 자주 묻는 질문에는 사람 수준으로 대답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현대카드는 전체 상담(월 평균 150만건) 가운데 30% 정도를 AI 상담원이 응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KEB하나은행은 최근 19개 은행 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AI '하나봇'을 현장에 투입했다. 사람이 반복 처리해야 하는 업무를 로봇에 맡긴 것이다. 예컨대 8000개 기업의 신용등급을 자동으로 업데이트해 금리를 산출하고, 자금 세탁 고위험군 데이터를 자동으로 뽑아내는 식이다. 연간 8만 시간에 달하는 업무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KB증권은 지난 2017년 말부터 로봇 기반 업무 자동화(RPA) 시스템을 구축해, 반복 처리해야 할 단순 업무를 로봇에 맡겼다. 예컨대 리서치센터 홈페이지에 업종별 데이터를 정리하고 보고서를 올리는 과정 등은 로봇이 떠맡았다. 이를 통해 연간 약 2만 시간의 업무 시간을 줄였다.

이런 변화는 앞으로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금융사 108곳 가운데 71개사(65.7%)가 이 같은 디지털 전환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전체 164개 사업에 5845억원을 투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