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정부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추진에 대해 강력 반발하고 있다. 산별노조 체제인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는 기업별 노조 중심 체제라는 노사관계 특수성이 존재하는데, 정부가 노동계 편을 들어 ILO 핵심협약 비준에 앞장서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립적·투쟁적 노사관계와 제도·관행 개선 없이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면 기업의 노사관계 부담만 더욱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올 3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민주노총이 ‘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동기본권 쟁취 전국노동자대회’를 열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2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현재 정부가 비준하고 있지 않은 ILO 핵심협약 4개 중 3개의 비준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언급한 협약 3개는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제87호와 제98호, 강제노동금지를 담은 제29호다. 국가보안법과 배치되는 강제노동 협약 105호는 제외됐다.

정부의 이번 발표는 지난 20일 노사정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된 논의를 사실상 종료한다고 밝힌 후 나왔다. 경사노위는 "수차례 실무회의를 열고, 운영위원회를 열어 집중 논의를 진행했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고 했다. 노동계는 해고자 노조 가입 등 핵심 협약 비준을 위한 국내법 개정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경영계는 파업시 대체 근로 허용 등이 필요하다고 맞섰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날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해 국회에 비준동의안과 관련 법안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면서 "경영계는 향후 정부의 의견수렴 과정과 국회의 논의과정에서 경영계 입장을 충실히 개진하고 협의해 나가겠다"고 했다.

경총은 "세계적으로 우리 국가경쟁력에 최대 걸림돌로 평가되고 있는 대립적·갈등적·불균형적 노사관계와 노동법제 속에서 단결권만 확대할 경우 예상되는 부작용과 사용자측의 우려가 매우 높다"며 "정부는 우리 특수성에 입각해 노사관계를 협력적·타협적·균형적으로 전환시키는 틀을 정립하는 국가 노동개혁 차원에서 사안을 다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노동계는 그동안 ILO 핵심협약 미비준시 EU가 실질적인 통상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재계는 정부가 언급한 노사관계 제도관행개선 위원회의 공익위원안이 경사노위 차원의 노사합의안도 아니고, 노동계 입장에 편향된 안이라는 점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경총은 "한·EU FTA(자유무역협정)에 따른 ILO 협약 비준 관련 협의는 우리 정부가 FTA 협정상의 조문과 규정의 틀 내에서 국익 보호 차원에서 적극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추광호 한국경제연구원 일자리전략실장은 "선법개정, 후비준 입장을 바꿔 비준안 동의와 관련 법개정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발표는 정부정책의 신뢰성을 저하한다"면서 "시간에 쫓겨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하게 반영하지 못한재 노사관계 제도 개선방안을 마련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추 실장은 이어 "주요 선진국·경쟁국처럼 파업시 대체근로 허용, 쟁의행위 찬반투표 절차 개선, 부당노동행위시 형사처벌 규정 폐지 등의 경영계 방어권을 보장하는 방안들이 다양하게 마련되기를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