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한 달여 전에 전화로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총회와 창사 50주년 행사 준비 잘하라고 당부하던 목소리가 선하다. 툭 털고 일어나실 줄 알았는데…."

8일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별세 소식에 대한항공 한 고위 임원은 "황망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조 회장은 최근까지 회사 업무를 거의 정상적으로 챙겼다. 이 때문에 그의 병세는 가족 이외에 알지 못했다. 한진그룹 직원들이 받은 충격도 그만큼 컸다.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생전 대한항공 여객기 앞에 서 있는 모습. 조 회장은 8일(현지 시각) 새벽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 병원에서 폐질환으로 별세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폐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은 뒤 회복 중이었다고 한다. 아내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 장남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차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임종을 지켰다.

조 회장은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45년 동안 '항공·운송의 외길'을 걸었다. 탄탄한 글로벌 인맥을 활용해 민간 외교관으로서 활약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과 조직위원장을 맡아 성공적 개최를 이끌었다. 그러나 '가족 관리'엔 성공하지 못했다. 2002년 그룹 승계 과정에서 형제들과 재산 분쟁을 겪었다. 최근엔 아내와 자녀들이 '물컵 갑질' 등으로 잇따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한진해운의 파산을 막지 못한 것도 오점으로 남는다.

◇대한항공을 글로벌 항공사로 키워

경영인으로서 조 회장은 우리나라 항공산업을 글로벌 톱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 회장은 1999년 선친인 조중훈 회장으로부터 한진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았을 때, 별도의 취임식을 갖지 않았다. "형식보다 성과로 리더십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조 회장이 공식 무대에 나선 것은 2000년 6월 항공동맹체인 '스카이팀(Sky Team)' 계약 체결식이었다. 델타항공·에어프랑스·에어로멕시코 등 글로벌 항공사 최고 경영자를 전방위적으로 만나며 스카이팀 창설을 주도했다. 대한항공이 글로벌 톱 항공사로 각인되는 계기였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술·담배도 하지 않고, 일이 취미였던 분이었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다. 외환 위기 직후인 1998년 대한항공은 미국 보잉과 27대 항공기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과 9·11 테러 등으로 세계 항공산업이 침체에 빠졌을 때는 최신형 항공기인 A380 항공기 구매 계약을 맺었다.

선제적 투자는 이후 빛을 발했다. 2006년 세계 항공시장이 반등하자, 글로벌 항공 수요를 흡수했다. 경쟁 항공사들이 뒤늦게 항공기 주문에 나섰지만, 제때 항공기를 도입하지 못했다. 1992년 조 회장의 대한항공 사장 취임 당시 77대이던 항공기는 현재 166대로 늘었다. 같은 기간 취항 노선은 20개국 52개 도시에서 44개국 124개 도시로 확대됐다.

민간 외교관·체육인으로 활약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지난해 1월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를 봉송하는 모습.

조 회장은 폭넓은 인맥으로 민간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조 회장은 2009년 평창유치위원회 위원장을 수락했다. 당시엔 평창올림픽 유치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보통 국적 항공사와 항공기 제작사들은 정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조 회장은 45년간 대한항공에서 근무하며 구축한 '항공사 인맥'을 총동원했다. 한·불 최고경영자클럽 회장과 전경련 한미재계회의 위원장 등을 지내며 쌓은 인맥도 십분 활용했다. 조 회장은 "국가가 하는 일에 나서는 것은 기업인의 의무"라고 했다. 조 회장은 유치위원장 자격으로 세계 곳곳을 찾았다. 약 64만km(지구 16바퀴) 출장하며. 110여명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대부분을 만났다. IOC 위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스피치 개인 과외'까지 받았다. 2011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자, 이번엔 조직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그러나 조 회장은 평창올림픽을 위원장 자격으로 끝까지 하지 못했다. 올림픽 개최를 7개월여 앞두고 외압으로 사퇴한 것이다. 하지만 조 회장은 올림픽조직위에 파견 나간 직원을 철수시키지 않았다. "국가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조 회장은 대한탁구협회장과 아시아탁구연합 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대한항공은 탁구·배구 실업팀과 스피드스케이팅 실업팀을 창단하기도 했다.

불운한 가족사

조 회장은 어릴 적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 미국 유학 중 귀국해 입대, 강원도 화천 비무장지대에서 복무했고, 베트남전에도 11개월 동안 파병됐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조 회장은 술·담배도 안 했고, 유일한 취미가 사진 찍기였다"고 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정작 자신의 가족들에겐 엄격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박수보다 비판을 받는 일이 잦았다. 2014년 장녀인 조현아 전 부사장의 '항공기 회항' 사건으로 조 회장은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머리를 숙였다. 작년에는 차녀인 조현민 전 전무와 아내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의 '갑질 논란'이 불거졌다. 조 회장은 2002년 선친인 조중훈 회장이 별세한 후엔 형제들과 경영권 분쟁을 겪었다. 차남인 조남호 회장과 4남인 조정호 회장은 선친의 유언장이 조작됐다며 조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삼남인 고 조수호 회장이 조 회장을 지지하면서 첫째와 셋째, 둘째와 넷째 형제가 손을 잡았다는 뜻의 '일삼-이사'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조 회장 형제들도 대부분 수난을 겪었다. 조남호 회장이 경영하던 한진중공업도 필리핀 수비크조선소 실패로 최근 경영권이 산업은행 등 채권단에 넘어갔다. 한진해운을 경영하던 조수호 회장도 일찍 타계했다.

이후 경영난을 겪던 한진해운을 조 회장이 맡아 1조원 넘은 돈을 투자했지만, 결국 파산을 막지 못했다. 재계 관계자는 "수송보국이라는 선친의 유언을 실천하기 위해 알짜인 '에쓰오일' 지분을 팔아 한진해운을 지원했다"며 "경영적인 측면만 보면 잘된 판단이 아니지만, 그만큼 운송업에 대한 사명감이 남달랐던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