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8일(한국 시각) 미국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세. 고(故) 조양호 회장은 국내 최초의 민영항공사인 대한항공(003490)을 세계적인 항공사로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한항공은 1969년 조중훈 창업주가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했을 당시에는 8대를 보유한 아시아의 작은 항공사였다. 국제선 노선도 일본 3개 도시가 전부로 아시아 11개 항공사 중 11위 기업이었다. 하지만, 현재 대한항공은 166대의 항공기를 보유한, 43개국 111개 도시의 국제선 노선을 확보한 세계적인 항공사다. 현재는 5대양 6대주를 아우르는 노선망을 갖췄다.

1969년 이후 국제선 여객 운항 횟수는 154배 늘었고, 연간 수송 여객 숫자 38배, 화물 수송량은 538배 성장했다. 매출은 1969년 36억원에서 지난해 12조6512억원으로 3514배 이상 늘었다.

대한항공은 특히 1990년대 이후 조 회장이 본격적으로 진두지휘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조 회장의 리더십, 적극적인 신 노선 개척과 대대적인 서비스 혁신, 끊임없는 변화와 과감한 투자가 원동력이 됐다. 조 회장은 1989년 한진정보통신 사장을 거쳐 1992년 대한항공 사장에, 1999년 대한항공 회장에 올랐다.

지난해 한진그룹 임원세미나에 참석한 조양호 회장.

◇불황 속 투자 전략으로 성장에 페달

조 회장은 위기 상황마다 적절한 투자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마련하는 데 탁월했다.

대한항공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사장이었던 조양호 회장의 전략에 따라 대한항공 운영 항공기 112대 중 임차기는 14대뿐, 대부분을 자체 소유 항공기로 운영했다. 이 때문에 매각 후 재임차 등을 통해 외환위기 당시 유동성 위기에 대처할 수 있었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이어지던 1998년 보잉737-800, 보잉737-900 기종 27대 구매 계약 체결했다. 보잉은 감사의 뜻으로 계약금을 줄이고 금융까지 유리하게 주선했다. 보잉737NG 기종은 외환위기 이후 대한항공 단거리 노선 성장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2001년 9·11 테러 사태와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항공산업이 위축됐을 때도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2003년 초대형 항공기인 A380 기종을 도입한 데 이어 2005년에는 보잉787 차세대 항공기 도입을 결정했다.

이러한 투자 덕분에 대한항공은 2006년 이후 글로벌 경제 회복으로 항공시장 호황 시점에 A380, 보잉777-300ER 등 차세대 항공기를 적기에 들여올 수 있었다. 반면 다른 항공사들은 그 때서야 항공기를 주문하기 시작했고, 항공기 제작사가 넘치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해 새로운 항공기 도입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으로 반전됐다.

조 회장 취임 5년 만인 2004년에는 대한항공이 국제항공운송협회(IATA)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항공수송통계 국제항공화물수송 부문 1위를 기록했다. 당시 19년 동안 이 부문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해온 독일 루프트한자항공을 앞질렀다. 대한항공은 2010년까지 6년 연속 1위 자리를 지켰다.

조 회장은 전 세계 항공업계가 대형항공사와 저비용 항공사(LCC)간 경쟁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시대의 변화를 내다보고 2008년 7월 진에어(Jin Air)를 창립하기도 했다.

지난 2000년 스카이팀 창설 당시 조양호(왼쪽 세 번째) 회장이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아에로멕시코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스카이팀 창설·항공계 UN회의 'IATA 총회' 한국 개최 주도

조 회장은 2000년대 업계 흐름에 발맞춰 국제 항공 동맹체 '스카이팀'(SkyTeam) 창설을 주도했다. 1990년대 말은 세계 최대항공사인 유나이티드항공과 아메리칸항공이 각각 맹주로 나서 스타얼라이언스와 원월드라는 항공 동맹체를 탄생시키는 등 세계 항공업계는 다자간 동맹체로 급물살을 타고 있던 시점이었다.

스카이팀에는 대한항공 외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아에로멕시코 등 4개사가 참여했다. 조 회장은 당시 양자간 제휴 관계를 맺고 있던 미국 델타항공의 레오 뮬린 회장에게 동맹체 결성을 제의했다. 양사의 최고경영자는 세계 최고의 강력한 동맹체를 만들기로 하고 유럽지역의 에어프랑스를 가입 권유에 나섰다. 이때 조양호 회장은 평소 친분이 있던 에어프랑스의 최고경영자를 직접 찾아가 뜻을 같이하자고 설득했다.

대한항공은 스카이팀 회원사들과의 공동마케팅을 통해 네트워크와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현재 스카이팀은 19개 회원사가 175개국 1150개 취항지를 연결하는 대표적 글로벌 동맹체로 자리매김했다. 연간 수송 승객 숫자는 6억3000만명이 넘는다.

2017년 7월 대한항공과 델타항공 관계자들이 조인트 벤처 협정 체결을 마친 후 기념 촬영하고 있다. 오른쪽 세 번째부터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에드 바스티안 델타항공 최고경영자, 스티브 시어 델타항공 국제선 사장 및 글로벌 세일즈 전무.

2018년에는 델타항공과의 조인트벤처 협력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대한항공은 델타항공과의 태평양 노선 조인트벤처를 통해 양사의 태평양 노선의 취항 도시를 활용한 공동운항을 확대하는 한편, 아시아와 미주 시장에서의 공동 판매하는 등 협력의 폭을 계속 늘려나가고 있다. 앞서 조 회장은 향후 항공사간 전략적 협력이 활성화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선제적으로 반독점면제(ATI, Anti-trust Immunity) 권한을 취득할 수 있도록 지시한 것이 조인트벤처 협력에 큰 역할을 했다. 대한항공은 2002년 미국 교통부로부터 반독점면제 권한을 취득했다.

조 회장은 오는 6월 1일부터 3일까지 사상 최초로 대한민국에서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제75차 연차총회를 유치하는 데 힘썼다. IATA는 현재 전 세계 120개국 287개 민간 항공사들이 회원으로 가입된 항공 관련 국제 협력기구다. 특히 국제항공업계의 정책 개발, 규제개선, 업무 표준화 등 항공산업 발전 및 권익을 대변하고 있으며, 회원 항공사들의 안전운항을 위한 감사 프로그램(IOSA, IATA Operational Safety Audit)을 운영하며 안전 운항 강화에도 힘쓰고 있다.

IATA 회의는 '항공업계의 UN 회의'라 불린다. IATA 연차총회가 한국에서 열리는 것은 전 세계 항공산업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정책 결정에서 대한민국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 회장은 IATA의 최고 정책심의 및 의결기구의 위원직을 20년 가까이 맡으며 대한민국에서 IATA 연차총회를 개최하는 데 총력을 다했다. 조 회장은 IATA 최고 정책 심의 및 의결기구인 집행위원회(BOG) 위원이자, 31명의 집행위원회 위원 중 별도 선출된 11명의 전략정책위원회(SPC) 위원으로서, IATA의 주요 전략 및 세부 정책 방향, 연간 예산, 회원사 자격 등의 굵직한 결정을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