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일 농심 법무팀 관계자들은 미국 연방법원의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공문 하나를 확인하고 만감이 교차했다. 농심과 오뚜기 등 국내 라면 업체들은 '가격 담합'과 관련해 미국 소매업체와 손해배상 소송을 벌였다. 미 연방법원은 작년 12월 '담합이 아니다'라며 국내 라면 업체 손을 들어줬고, 미국 소매업체는 이날 공식적으로 항소를 포기한다는 공문을 법원 게시판에 올린 것이다. 지난 7년 동안 끌어온 '가격 담합'과 관련해 한국과 미국에서 진행돼 온 소송이 공식적으로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농심 관계자는 "그동안 소송에 대응하느라 수백억원을 쓰고, '담합 기업'이라는 불명예까지 뒤집어썼다"며 "원하던 결과를 얻었지만 허탈하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한국 공정거래위원회의 무리한 조치가 국내 기업들을 해외에서 부당하게 곤경에 빠지게 한 대표적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난 7년 동안 국내 라면 업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7년 만에 벗은 '가격 담합' 오명
공정거래위원회는 2012년 3월 농심과 삼양식품, 오뚜기, 팔도(당시 한국야쿠르트) 등 4개 라면 업체가 2001년부터 10년 동안 가격을 담합해 온 사실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업체들에 과징금 1354억원도 부과했다. 당시 라면 업계 2위였던 삼양식품은 담합 사실을 자진신고(리니언시)해 과징금을 면제받았다. 라면 업계의 담합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서민 음식인 라면으로 소비자 주머니를 털어갔다"는 비판 여론이 비등했다.
삼양식품을 제외한 3개 라면 업체는 공정위 결정에 불복해 서울고등법원에 행정소송을 냈다. 이런 사실은 미국에도 알려졌다. 2013년 더플라자컴퍼니 등 미국 유통업체들이 국내 라면 4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미국 유통 업체들은 미국에서 팔린 라면들도 '가격 담합'을 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당시 한국에 사무소를 운영하던 미국의 한 로펌이 소송을 대리했다. 손해배상액만 1500억원이었다. 한 라면 업체 관계자는 "담합을 중죄로 처벌하는 미국에서 담합이 인정되면,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포함해 수천억원을 물어내야 할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해 11월 서울고법이 담합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면서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되는 듯했다. 미국 로펌은 "천문학적 손해배상을 피하려면 합의를 하라"며 한국 라면 업체를 압박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 삼양은 2015년 9월 담합 사실을 인정하고 150만달러(약 17억550만원)에 원고 측과 합의했다. 농심 관계자는 "당시 합의에 대한 유혹이 컸지만 '담합 기업'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소송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뒤집은 것은 한국 대법원이었다. 2015년 대법원은 "단순히 가격 등과 관련한 정보 교환만으로 합의라고 단정할 수 없고, 시장의 구조와 특성 등을 고려해야 한다"며 라면 업체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대법원 판결에는 기획재정부 물가 담당 공무원의 증언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 공무원은 법정에서 "서민 물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라면 가격은 1위 업체와 정부가 협의해왔다"고 밝혔다. 사실상 라면 가격을 정부가 결정해 온 것을 인정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 후 미국 내 소송 기류도 바뀌었다. 지난 1월 미국 연방법원은 농심 등 한국 라면 업체의 손을 들어줬다. 일부 배상금도 인정하지 않은, 라면 업체의 완전한 승소였다.
◇상처만 남은 소송전
식품업계에선 공정위의 '담합 판단'에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라면 업체들은 2007년 제품 가격을 10% 안팎 인상했다. 물가 인상 부담을 느낀 정부는 2008년 라면·우유 등 '50개 생필품'을 선정해 특별관리에 들어갔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당시 제품 가격을 올린 업체들이 정부에 미운털이 박혔다"며 "대표 제품인 라면이 그 유탄을 맞았던 셈"이라고 말했다.
비록 승소했지만, 라면 업계엔 깊은 상처가 남았다. 미국과 한국에서 소송에 대응하느라 3개 라면 업체가 부담한 소송 비용만 45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년간 당기순이익의 10%를 웃도는 금액이다. 담합을 자진 신고했던 삼양식품도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됐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당시 천문학적 과징금을 부담하면 회사의 존망이 위태로울 정도였다"며 "경영상의 판단에 따라 담합을 인정했던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