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와 직접 관련이 없는 책임투자분과 위원까지 긴급 소집해 조양호 회장의 대한항공 이사 재선임안 반대 결정을 밀어붙인 것을 두고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사전 예고도 없이 다른 분과 위원을 불러 표 대결에 참여시킨 데다, 공교롭게도 뒤늦게 합류한 위원 2명 모두 반대표를 던져 팽팽했던 균형이 순식간에 깨졌다. 수탁자책임위원 70% 정도가 정부와 노동계, 시민단체가 추천한 위원이라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난 26일 오후 3시 반, 국민연금의 수탁자책임위원회 주주권행사분과 위원 8명은 전날에 이어 대한항공 주총에 대해 팽팽한 논의를 이어갔다. 가장 큰 쟁점은 조양호 회장의 주주 가치 훼손 행위 여부였다. 김경율 위원(참여연대 추천) 등은 "조 회장은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이라 이사직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기업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 등은 연금이 조 회장의 연임에 반대하지 않으면 위원 자리를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고 한다. 반면 최준선 위원(한국경영자총협회 추천) 등은 "기업 경영권을 흔드는 것은 주주 가치 제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민연금이 나서서 조 회장을 끌어내리는 모양새가 적절하지 않다" 등의 이유를 들어 반박했다. 오후 6시, 1차 표결을 했으나 반대 4명, 찬성 및 중립·기권 4명으로 여전히 과반수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이에 박상수 위원장(국민연금 추천)이 수탁자책임위 내 다른 분과인 책임투자분과 위원까지 포함한 전체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그러자 일부 위원은 이틀 동안 격론이 벌어진 사안인데 갑자기 책임투자 분과를 참여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조 회장 연임을 반대한 위원조차 "안건을 깊이 검토하지 않은 위원들이 (조 회장 이사 재선임 같은) 중요한 사안에 결정권을 갖는 것은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전체회의를 열어야 한다면 사전에 책임투자분과 위원들에게도 공지하고 안건 검토 시간을 줬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위원 5명이 전체회의에 찬성했다. 수탁자책임위 운영 규정상 위원 5인 이상 또는 위원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전체 회의를 개최할 수 있다.
하지만 연락을 받은 책임투자분과 위원 5명 중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민주노총·한국노총 추천)와 이상민 서강대 교수(소비자단체협 추천) 2명만이 뒤늦게 합류했고, 두 사람 모두 반대표를 던졌다. 이에 따라 회의에 참석한 10명 중 6명의 반대로 국민연금이 조 회장의 연임에 반대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한 주주권행사분과 위원은 "주주권 행사분과 8명 중 반대 의견이 4명으로 과반이 안 되니 기필코 반대를 밀어붙이려고 전체회의를 강행한 것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와 관련, 복지부 관계자는 "절차상 문제는 없다"며 "기금운용본부 측이 안건에 대해 설명한 후 투표를 했다"고 설명했다.
수탁자책임위의 구성 자체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수탁자책임위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와 책임투자 방향을 검토·결정하는 민간 전문가 기구다. 하지만 14명의 위원 중 10명이 정부와 노동조합, 시민단체,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 추천해 복지부가 위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