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003490)사내이사 재선임이 좌절됐다. 2대주주인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진 것이 '결정타'가 됐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이 국내 1위 국적항공사 대표를 끌어내리는 초유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대한항공은 27일 서울 방화동 본사에서 개최한 정기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을 부결시켰다.
이에 따라 조 회장은 대한항공 대표이사에 선임되지 못해 경영권을 잃게 됐다. 지난 1992년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지 27년만이다. 그는 1999년 아버지인 고(故) 조중훈 회장의 뒤를 이어 대표이사 회장이 됐다.
이날 주총을 주재한 우기홍 대한항공 대표이사 부사장은 "주주들이 조 회장의 재선임에 64.1%가 찬성했고 35.9%가 반대했다"며 "이에 따라 3분의 2 찬성 요건을 만족하지 못해 조 회장은 사내이사로 재선임되지 못했다"고 전했다.
조 회장의 사내이사로 재선임되지 못한 것은 2대주주인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진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의 지분의 11.6%를 보유한 2대 주주다. 조 회장과 한진칼 등 특수관계인은 33.4%를 갖고 있다.
전날 국민연금은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회의를 갖고 조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에 대해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수탁자책임위는 "조 회장이 기업가치 훼손과 주주권 침해의 이력이 있다고 판단한다"고 반대 결정의 이유를 밝혔다.
외국인투자자와 일부 소액주주들도 조 회장에게 등을 돌린 것으로 분석된다. 앞서 글로벌 의결권 자문기관인 ISS와 서스틴베스트 등은 조 회장이 잦은 검찰 기소로 기업가치를 훼손한 책임이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주주들에게 조 회장 연임에 대해 반대할 것을 권고했다.
이번 주총 결과에 따라 대한항공은 향후 주요 사업의 의사결정과 추진 과정 등에서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조 회장이 대표이사에서 물러나도 당장 조 회장 측을 중심으로 한 현 경영진 체제가 붕괴되는 것은 아니다. 조 회장의 아들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과 우기홍 부사장이 2인 대표이사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조 회장이 경영진에서 빠질 경우 미국 델타항공과의 조인트벤처(JV) 가동과 주요 신(新)항로 노선 개척 등 회사 실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주요 현안에서 리더십 공백 사태가 벌어져 경영 위기를 겪게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최근 대한항공의 실적도 계속 악화되는 추세다. 글로벌 항공시장의 경쟁 심화와 함께 저비용항공사(LCC)들의 성장, 국제유가 상승과 환율 불안 등으로 경영환경이 악화되고 있다. 지난 2016년 1조790억원이었던 영업이익은 2017년 9561억원, 지난해는 6674억원으로 계속 감소했다.
재계와 금융시장 등에서는 향후 대한항공의 실적이 더욱 악화되고 경영 불안이 가중될 경우 국민연금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특히 지난해 조 회장 일가의 갑질 논란과 탈세, 배임, 횡령 등 여러 의혹에 대한 사법부 판결에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와 연결된 국민연금이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는 비판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경영진의 잘못을 단죄하는 기관이 아닌, 가입자인 국민의 투자수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기관"이라며 "만약 조 회장에 대한 경영권 박탈로 대한항공의 경영 위기가 심화되고 주가가 하락할 경우 국민연금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