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은 '태풍의 핵'으로 꼽혔습니다. 국내 주식 시장에서 109조원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주총 안건에 대해 의결권 행사 방향을 사전에 공개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행동주의 펀드가 주요 대기업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큰손' 국민연금의 선택은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 다들 바짝 긴장한 것이죠.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다는 분석입니다.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큰 문제 없이 주총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현대건설·기아차·효성 등은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감사위원 선임안 등을 통과시켰습니다. 22일 삼성바이오로직스 주주총회에서도 국민연금은 분식회계 등을 이유로 재무제표 승인과 사내·사외이사 선임 건을 모두 반대했지만, 회사 안대로 가결됐습니다.

연전연패(連戰連敗)를 이어가다 보니 국민연금이 '종이호랑이'로 전락해 체면을 잔뜩 구겼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정권 코드 맞추기식 결론을 내리는 것 아니냐'는 비판까지 받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최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현대엘리베이터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에 대해 '기권' 결정을 내렸습니다. 지난해 1월 현대상선이 현 회장 등 전직 임직원 5명을 배임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소해, 현 회장은 현재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앞서 2016년에는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현 회장 일가가 보유한 회사에 일감을 부당하게 몰아준 것이 적발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을 부과받기도 했습니다.

국민연금은 "계열사의 부당지원 행위가 있어 기업 가치의 훼손이 있다고 볼 수 있다"면서도 "장기적인 주주가치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재선임안에 기권했습니다. 상장사협의회는 "국민연금이 경영진 견제에만 치우치지 말고 중장기적 기업·주주가치 제고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며 이 같은 결정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재계 일각에서는 "삼성 등도 똑같이 재판을 받고 있는데 국민연금이 대북 사업 등 정권과 코드가 맞는 기업에는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미운털이 박힌 기업에만 엄정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1592개의 상장사 주총이 예정돼 있습니다. 업계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것은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이 걸려있는 대한항공(27일)과 석태수 대표의 연임안이 걸려 있는 한진칼(29일) 주총입니다. 국민연금은 이 주총들에 앞서 의결권 행사 방향을 밝힐 계획인데, '찍힌 놈에게만 가혹하다'는 재계의 비판이 일리 있는 것인지 지켜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