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연세대 수시전형에 합격했던 A(19)군은 지금 재수 생활을 하고 있다. 등록금 마감 시각인 2월 1일 오후 4시까지 등록금을 보내지 못하는 바람에 합격이 취소됐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이 2015년 9월 보이스피싱 피해를 막겠다며 도입한 '30분 지연 인출·이체제'가 문제였다. 은행 계좌에 100만원 이상 현금이 입금되면 전(全) 국민이 30분간 자동화기기(ATM)에서 인출 혹은 계좌 이체를 하지 못하게 한 제도다. 마감일 오전 우체국에서 등록금을 보내려던 A군의 부모는 이 제도 때문에 실제로는 이체가 되지 않은 것을 모르고 있다가 취소 통보를 받았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보이스피싱은 못 막고 국민만 골탕먹인다"며 이 제도를 폐지해달라는 청원이 여럿 올라와 있다. 보이스피싱 범죄자는 이미 30분씩 전화 통화를 하면서 시간을 끌거나, 100만원 이하로 쪼개기 송금을 요구하면서 이 규제를 무력화한 상황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해외에선 고령(高齡)의 고객이나 장애인이 갑자기 큰돈을 출금·이체하면 금융기관이 전화로 보이스피싱 여부를 확인하는 식으로 범죄 피해는 줄이고 국민 불편을 최소화한다"고 했다.

전 국민 '불편'으로 유지되는 규제

A군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정부가 정교한 해결책 없이 행정 편의를 위해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규제를 내놓으면서, 문제는 그대로인 채 국민 불편만 가중되는 일이 우리 생활 곳곳에 산재해 있다. 작년 9월 말 시행된 개정 도로교통법의 '6세 미만 영·유아 카시트 의무화' 법이 대표적이다. 영·유아가 자동차를 탈 때 보호용 장구(카시트)를 장착하도록 하고 이를 위반하면 6만원의 과태료를 내게 했다. 취지는 좋지만 택시·버스 등 대중교통은 아무런 준비가 없어 '무법 지대'가 됐다. 부모들은 "외출할 때마다 일일이 자녀 수대로 카시트를 들고 다닐 수도 없고 대중교통에는 제대로 된 고정 장치조차 없다"고 한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도 이 제도의 폐지와 정비를 요청하는 청원이 70여건 올라와 있다. 경찰도 제도 시행 하루 만에 "실효성이 없다"며 단속을 유예한 상태다.

'휴대폰 카메라 강제 셔터음' 규제는 몰카 범죄를 막겠다며 2013년 당시 정보통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카메라폰 오·남용 규제 방안'으로 발표했다. 이어 60~68데시벨(dB)의 촬영음이 나도록 하는 표준 규격이 나왔고, 삼성·LG 등 국내 제조업체들이 '정부 지침'이라며 도입했다.

도입 초기에는 몰카 범죄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무음(無音)카메라 앱이 나오면서 바로 무용지물이 됐다. 최근에는 도리어 회의나 수업, 공공장소에서 '찰칵' 소리 때문에 창피하다는 이용자 불만만 커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는 한국·일본에만 있는 규제라서 지난해부터는 삼성 스마트폰 이용자가 해외에 나가면 자동으로 무음 처리되는 기능을 적용했다"고 말했다.

"포괄 규제는 국민 불신, 정부 책임 회피"

'외국인 가사도우미 금지' 역시 회사업무·육아(育兒)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젊은 부부들로부터 대표적인 생활 규제로 꼽힌다. 현행법상 외국인은 재외동포이거나 결혼이민자 등 내국인에 준하는 신분을 갖춘 사람만 가사도우미로 일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월 200만원 안팎을 줘야 하는 조선족 입주 도우미는 허용되지만, 월 70만원(해외 급여 기준)에 영어까지 구사하는 필리핀 도우미는 불법이다. 한국인 도우미들이 입주를 꺼리다 보니 중국 교포들이 시장을 장악했다. 한 30대 직장인 여성은 "애가 둘 이상이면 안 받고 휴가에 명절 보너스까지 달라고 하는 등 사실상 수퍼 갑(甲)"이라며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부가 해외에선 허용된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막는 것은 모순"이라고 했다.

'대포통장(타인 명의의 불법 계좌)'을 없애겠다며 통장 개설 후 20일(은행 영업일 기준) 이내에 추가로 통장을 만들지 못하도록 한 규제도 원성을 사고 있다. 직장인 박모(38)씨는 "인터넷 은행 가입 후 은행에서 전세금 대출용 통장을 만들려 했더니 '휴일을 포함해 한 달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고 말했다.

최신융 숙명여대 행정학과 교수(전 규제학회장)는 "포괄적인 규제는 정부가 국민을 불신하는 것이고 가급적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방식"이라며 "규제를 만들 때는 규제가 가져오는 사회적 비용, 편익을 충분히 분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