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이 잔뜩 흐리자, 집 나갔던 '비둘기(돈 풀기 등 통화 완화 기조)'가 속속 복귀하고 있다. "세계경제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번개 한 번이면 폭풍우로 변할 수 있다"던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국제통화기금) 총재의 우려가 나온 게 꼭 한 달 전(2월 10일)이다. 그사이 세계 각국의 경기 둔화 조짐이 뚜렷해졌다. 미·중 무역 분쟁, 그에 따른 중국 경기 둔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이 세계경제 전문가들이 지목하는 '먹구름'이다. 지난 6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을 넉 달 전 전망치보다 0.2%포인트 낮춘 3.3%로 수정했고, 특히 유로 지역 성장률은 종전 1.8%에서 1.0%로 대폭 내리면서 경기 둔화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이에 따라 각국 중앙은행들은 그간의 '매파'적인 긴축(돈줄 죄기) 움직임을 중단하고 '비둘기파'의 완화적 태도로 속속 돌아서는 중이다. 금융 위기 이후 7년간 제로(0) 금리를 유지했던 미국은 지난 3년간 금리를 0%에서 최고 연 2.5%까지 끌어올렸다가 잠시 멈췄고, 유럽중앙은행은 제로 금리를 연말까지 유지하면서 돈도 더 풀기로 했다. 최악의 성장률 둔화에 직면한 중국은 이미 지급준비율 인하 같은 부양책을 내놨고, 일본 등도 양적 완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다시 전면에 선 중앙은행들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 7일(이하 현지 시각) 통화정책회의에서 사상 최저 수준인 금리를 연말까지 유지하고, 9월부터 TLTRO(장기특정대출 프로그램)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지금도 유로존의 정책 금리는 0%,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돈을 맡길 때 받는 예금 금리는 -0.4%다. 시중은행들은 중앙은행에 돈을 맡기면 이자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수수료를 내야 하는, 즉 억지로라도 시중에 돈을 많이 빌려줘야 하는 상황이다. TLTRO는 2014년, 2016년에도 썼던 경기 부양책으로, 은행에 저리로 자금을 빌려주는 제도다. 이번에 세 번째로 들고나왔다. 이미 앞서 두 차례 실시한 TLTRO로 유로존에 풀린 돈은 920조원에 육박한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유로존 경제가 지속적인 약화와 만연한 불확실성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유럽만큼이나 뚜렷한 완화 기조로 돌아선 곳은 미국이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7년간 유지했던 제로 금리 정책을 마감하고 2015년 말부터 금리 인상 사이클에 시동을 걸었다. 2016년 한 차례, 2017년 세 차례, 지난해에도 네 차례 금리를 올렸고, 올해도 두세 차례 금리를 올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작년 말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면서 금리 인상을 유보했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10일 CBS방송에 나와 "금리 인상을 중단했느냐"는 질문에 "우리의 정책 금리는 적절한 수준이므로 인내심을 갖겠다"고 말했다. '인내심'이 무슨 뜻이냐고 재차 묻자 "우리가 금리 정책을 바꾸는 데 전혀 급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시장 참가자 중 연준이 이달 19~20일 있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금리를 올릴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단 0.8%뿐이다. 99.2%가 '동결'을 예상하고 있다.

◇세계의 골칫거리, 중국

각국 중앙은행이 다시 부양책을 꺼내게 등 떠민 장본인은 누가 뭐래도 중국이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28년 만에 최저인 6.6%에 그쳤고, 올해는 6.0%를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가 중국 성장률을 공식 발표치보다 2%포인트는 깎아서 봐야 할 정도라고 했으니, 실제론 6% 성장도 어려울 수 있다. 사정이 이렇자 중국은 경기 경착륙을 막기 위해 그림자 금융(금융 감독이 느슨한 제2금융권 대출 등)을 일부 허용하기로 하는 등 고삐를 살짝 풀기 시작했다. 인민은행은 올 들어 1월에만 중소·민영기업에 신규 대출을 43조원어치 실시하는 한편, 지급준비율(지준율)을 1월에 두 차례 각 0.5%포인트씩 총 1%포인트 내렸다. 지준율은 은행이 비상시에 예금을 지급하기 위해 중앙은행에 넣어둬야 하는 현금 비율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준율을 내리면 시중에 현금이 늘어나는 효과가 난다.

14~15일 있을 일본중앙은행(BOJ) 통화정책회의에서도 추가 완화 정책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솔솔 나오고 있다. 일본도 중국 등 영향으로 수출과 생산이 둔화 국면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요 중앙은행들이 추가 양적 완화나 강력한 완화 신호를 보내면 경쟁 통화인 엔화는 가치 상승 압력을 받게 된다. 지난달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는 "엔화 강세 때문에 2% 물가 상승률 목표 달성이 위협받는다면 일본은행이 부양책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라고 밝혔다.

◇금리 더 내릴 여력 있나

이 밖에 브라질, 인도, 호주 등은 금리 인하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캐나다와 영국 등은 연준처럼 금리 인상을 연기할 것으로 전망된다. 브루스 캐스먼 JP모건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중앙은행들에) 비둘기 색채가 확산되는 움직임이 뚜렷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2008년 금융 위기 때와는 달리 중앙은행들이 쓸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게 문제다. 이미 제로 금리에 가까울 정도로 금리가 상당히 낮은 상황에서 더 내릴 여력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이 가장 다급한 ECB의 경우 앞으로 마이너스 금리 폭을 더 확대하거나, 채권이나 상장지수펀드(ETF)를 중앙은행이 사들여 돈을 푸는 방법도 거론된다. 이미선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중국은 대출금리 인하를 단행하고, 미국은 연말쯤 금리 인상 종료 선언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이주열의 선택은?]

IMF는 한국에 금리인하 충고… 韓銀 "아직 검토 단계 아니다"

12일 한국을 다녀간 국제통화기금(IMF) 연례협의 미션단이 한국 경제가 중단기적 역풍을 맞고 있으니 대규모 추가경정예산 편성과 함께 "명확히 완화적인 통화정책 기조를 가져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은행이 고민에 빠졌다. 한은은 지금도 이미 통화정책 기조가 완화적이어서 금리를 내릴 때가 아니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달 말 금리를 동결하며 "기준 금리가 여전히 완화적 수준이라 인하를 검토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한은은 작년 11월 금리를 연 1.50%에서 연 1.75%로 올린 후 올해 두 차례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를 유지했다. 한은 관계자는 "작년 11월 금리를 올렸을 때도 경제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 것은 아니고, 대내외 여건이 불확실하긴 하지만 여전히 늘어나는 가계 부채 등 금융 안정을 고려할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올해 우리 경제성장률이 잘해야 2.6%쯤 되는 상황이고, 중국과 반도체 경기가 예상보다 악화되면 이마저도 쉽지 않다는 분위기다. 수출 감소세가 중국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확대되면서 지난해 12월 이후 4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게 될 위기다. 게다가 IMF 연례협의단은 가계부채 증가 문제도 정부의 거시건전성 조치들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어 크게 걱정할 게 못 된다고 했다.

☞매파·비둘기파

통화 정책을 두고 물가 안정을 위해 금리를 올리자는 ‘긴축’ 세력을 공격적인 이미지의 매에 비유해 ‘매파’, 경제성장을 위해 금리를 내리자는 ‘완화’ 세력을 부드러운 이미지의 비둘기에 비유해 ‘비둘기파’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