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크(Ike), 이 업무는 최대한 빨리 부탁할게요."
"어려울 것 같은데 노력할게요, 스티브(Steve)."
영어 이름 아이크를 쓰는 삼성전자 A 부장이 후배 사원 스티브에게 업무 지시를 받는다. 대부분 직장인이라면 경악할만한 일이지만, 서울 관악구 삼성전자-서울대 공동연구소에 있는 C랩(크리에이티브 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C랩은 삼성전자가 2012년 말 도입한 사내 벤처 프로그램이다. 창의 문화를 확산하고 실리콘밸리식 조직 혁신 모델을 기존 조직에 접목한다는 목표를 위해 도입됐다.
C랩 지원을 맡은 삼성전자 창의개발센터의 유채현 파트너는 "C랩은 연령과 직급, 호칭에 구애받지 않고, 영어 이름만으로 서로 부른다"며 "지원조직도 동반자라는 의미의 파트너라는 호칭으로 불린다"고 말했다.
지난 6일 오후 방문한 연구소 7층 C랩 사무실에는 4~5명으로 구성된 팀들이 일하고 있었다. 직원들은 후드 티와 청바지 차림이었다. 일부는 헤드폰을 낀 채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한창 업무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지만 자리를 비운 직원들도 많았다. 출퇴근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사무실 벽 한켠에는 '오늘의 작은 아이디어가 미래의 혁신에 불을 붙인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C랩에 선정된 직원은 1년간 기존 업무에서 완전히 빠져 서울대 연구소 또는 수원사업장의 독립된 C랩 공간에서 과제에 몰두할 수 있다. 팀 구성, 예산 활용, 일정 관리 등 과제 운영 전반을 팀 내에서 자율적으로 운영한다.
아이디어가 채택된 제안자는 팀원 선발권을 갖는다. 필요한 기술·재능을 가진 팀원 3~5명을 사내에서 자유롭게 뽑을 수 있다. 부서가 달라도, 자신보다 선임이어도 상관없다. C랩에서 잉태돼 성공적으로 분사된 '웰트(WELT)' 팀의 경우다. 비만 관리 허리띠를 만드는 웰트팀은 사원급 직원이 리더를 맡고, 부장급 수석연구원이 팀원으로 합류했다.
C랩은 '가볍고 기민하게(lean & agile)' 움직인다. 고민할 시간에 일단 시작하고 본다. 최종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아이디어 단계서부터 시제품을 만들어 사내 전시회에서 임직원들에 공개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제품을 진화시킨다. 이 사이클을 빠르게 반복하면서 사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성공에 익숙한 삼성이지만, C랩은 '명예로운 실패'를 장려한다. 높은 목표에 과감하게 도전했으니 책임을 묻지 않는다. 분사 후 5년 내 재입사도 가능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껏 도전하는 문화를 장려하려는 취지다. 1년 기간이 끝나면, 과제 종료 후 원래 부서로 돌아가거나 별도 회사를 차릴 수 있다.
C랩에서는 2012년 말부터 이달까지 총 978명이 247개 과제를 추진해, 183개가 완료됐고, 45개는 진행 중이다.
정동욱 파트너는 "제조기업인 삼성전자에서 뿌리내릴 수 없던 아이디어들이 C랩을 통해 탄생하고 있다"며 "삼성전자에 숨어 있는 잠재력을 끄집어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