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는 '농구대잔치', '마지막 승부', '슬램덩크' 등 농구가 큰 인기를 모았다. 그 뜨거웠던 농구 열기 한복판에 연세대 농구부가 있었다. KBL 프로농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팀과 대학팀이 모두 참여하는 농구대잔치에서 연대 농구팀은 1993-1994 시즌에 대학팀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기아차, 삼성전자, 현대전자 등 쟁쟁했던 실업 강팀을 모두 꺾으면서 거둔 성과였다.
당시 연대 농구부 선수였던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 우지원, 김훈 등은 요즘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이들을 혹독한 훈련과 뛰어난 용병술로 성과를 냈던 리더가 최희암 전 연대 농구부 감독이다. 그는 연대 농구부에 이어 울산 모비스, 인천 전자랜드 등 프로농구팀을 이끌면서 전설의 농구감독이 됐다.
최 전 감독은 2009년 농구 코트를 떠났다. 지금은 용접봉을 만지는 기업인이다. 전자랜드 감독 시절 알고 지냈던 구단주 친형 홍민철 고려용접봉 회장의 제안으로 중국 대련 공장장을 거쳐 지금은 부회장까지 승진했다. 전자랜드 감독 시절 그를 눈여겨본 홍민철 회장은 과감하게 중국 다롄법인을 통째로 맡겼다. '코끼리표' 용접봉으로 유명한 고려용접봉(KISWEL)은 연 매출 3000억원 규모의 회사다.
최 부회장은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조선소를 상대로 영업하고, 공장을 관리하기 위해 주로 창원에 머물고 있다. 부회장 승진 이후에는 대외 활동을 위해 종종 서울을 찾는다. 최 부회장을 지난 14일 서울 중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31살에 연대 감독 맡아…전자랜드 감독 때 눈에 띄어 법인장 발탁
최 부회장이 1986년 31살 나이로 연대 감독을 맡고, 직업을 바꿔 용접봉 회사에서 부회장까지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회가 왔을 때마다 놓치지 않는 열정과 실력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행운도 작용했다.
그는 휘문고 졸업 후 연대 농구부에 들어갔지만, 실력이 뛰어났던 동기들에게 밀려 늘 벤치 신세였다. 대학 4학년 때도 동기들이 대표팀에 차출돼 훈련을 받는 동안 학교에 남았다. 마침 그 때 미국 동부를 대표하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전설적인 감독 딘 스미스로부터 농구를 배운 도널드 휴스턴이 연대 농구부를 찾았다. 영어가 가능했던 사람은 최 부회장밖에 없었고, 그는 사전을 옆구리에 끼고 통역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미국 선진 농구를 배웠다.
최 부회장은 대학 졸업 후 선수 은퇴를 했고, 현대건설에 입사해 이라크 파견을 다녀오고 퇴사했다. 이후 고등학교 교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모교인 연대 농구부에 인사하러 갔다가 "곧 대회가 열리는데 시간 있으면 학생들 훈련 좀 봐달라"는 말을 듣고 임시 감독직을 맡은 것이 17년이 됐다. 그는 "도널드 휴스턴으로부터 미국 농구를 배운 것을 학교 측에서 알고 있었고, 겨울철 동계훈련 등에서 트레이너를 했던 경험을 인정해 감독을 맡긴 것 같다"고 했다.
고려용접봉 입사를 제안 받았을 때는 경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때였다. 2006년 동국대 감독 시절 홍봉철 전자랜드 구단주 요청으로 전자랜드 농구팀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를 홍봉철 구단주의 형인 홍민철 회장이 눈여겨봤다. 홍 회장은 최 부회장이 전자랜드 감독으로 재계약이 되지 않자 "공장장 한 번 해보라"며 중국 대련 법인장을 제안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말대로 농구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최 부회장의 리더십을 믿은 것이다. 그는 "처음엔 경영이라고까지 생각 못하고 새로운 것을 해보자고 수락했다"고 했다.
◇ "팀장은 코치고 팀원은 선수…경영, 농구와 비슷하면서도 달라"
올해 10년차 기업인이 된 최 부회장은 농구팀 운영과 기업 경영 모두 사람을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비슷하다고 했다. 농구 감독에게 필요한 능력이 '선수구성능력'과 '위기관리능력' 두 가지인데, 기업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는 "팀장은 코치, 팀원은 선수라고 생각하면 농구와 기업이 비슷한 것 같다"며 "감독은 선수를 잘 알아야 하듯이 회사에서도 경비, 청소직원 생각까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고 했다.
농구팀과 기업이 다른 점도 있다고 했다. 농구는 승리‧우승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팀 전체가 뛰지만, 기업에서는 구성원마다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관리가 훨씬 어렵다는 것이다. 최 부회장은 "농구는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하면서 강하게 밀어 붙이더라도 구성원들이 이해했지만, 기업에서는 같은 방식이 먹히지 않았다"며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설득하는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부분이 힘들었다"고 했다.
최 부회장은 연대 감독 시절 훈련이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팬티만 입고 얼음물에 들어가게 하는 등 강도 높은 훈련에 문경은, 서장훈 등 선수들이 도망친 일화는 널리 알려졌다.
그는 전설의 연대 농구팀을 이끌었던 경험이 회사 생활에 도움이 됐다고 털어놨다. 최 부회장은 연대 감독 시절 아직 고교생이던 문경은, 서장훈, 우지원 등 우수 선수들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매일 집에 찾아가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냉대 받더라도 가는 끈기가 필요했다"고 회고했다. 이제는 조선소 등 거래처 문턱을 닳도록 넘고 있다. 경영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지만, 입사하자마자 중국 다롄 법인을 맡으면서 STX다롄조선소 부도 위기 등을 몸으로 부딪치면서 배워나갔다.
◇ "영업은 꽃이다"는 자주 쓰는 건배사…"은퇴 후 마음 놓고 농구 보고싶다"
최 부회장은 스스로 말하는 '잔디밭 이론'에 따라 조직 관리 부문에서 융통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라고 푯말을 세워도 길이 가까우면 사람들이 질러간다. 그러면 굳이 불법자로 만들지 말고 차라리 돌을 깔고 길을 내줘야 한다"며 "회사에서도 문제 될 것이 없다면 불필요한 것을 없애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만의 건배사도 있다. 영업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영업팀과 회식할 때는 "영업은 꽃이다"라는 건배사를 즐겨 사용한다. 여기에 맞춰 "생산은 뿌리다", "△△(기타 부서)는 줄기다"라는 다른 표현도 있다.
최 부회장은 경영인으로서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제' 등 현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생각도 털어놓았다. 그는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사람을 더 뽑게 되면서 인건비 부담이 커졌다. 시황이 좋을 때 사람을 더 뽑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나빠졌을 때 줄일 수 없기 때문에 부담이 된다"며 "기업은 늘 경기가 안 좋을 때를 생각하는데, 정부가 조금 더 세밀하게 정책을 조정해주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농구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특히 KBL 프로농구 발전 방향에 대해 평소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드러냈다. 그는 "중국 프로농구팀과 교류하면서 중국 관광객을 농구장으로 유도해야 한다"며 "외국 용병도 서양인만 쓸 것이 아니라 동남아 출신 선수들을 적극 기용해 문화적 진출도 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은퇴 후 마음 놓고 농구 경기를 보러 다니고 싶다고 했다.
최 부회장은 오는 3월 16일 회사 직원들과 함께 창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인천 전자랜드와 창원 LG의 6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보기로 했다. 인천전자랜드와 창원LG는 2018-2019 정규리그에서 나란히 2‧3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시즌 막판이고 상위권 팀끼리 치르는 경기라 기대가 된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