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문 제이에스티나 회장이 조선비즈와 가진 인터뷰에서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출마 배경과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손목시계는 시간을 오차없이 알려주는 스마트폰과 스마트 와치 등 IT기기가 대세로 자리를 잡으면서 수요가 과거보다 줄었다.

국민소득이 높아져 해외 명품 시계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토종 브랜드 시계의 존재는 시나브로 잊혀지고 있다. 그래도 로만손 시계는 여전히 토종 시계 브랜드로서의 자존심과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김기문 제이에스티나 회장(64·진해마천주물공단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오리엔트, 갤럭시 등과 함께 한국 시계 시장을 주름잡았던 토종 브랜드 로만손을 만들어 키우고 주얼리과 패션까지 사업을 확장한 기업인이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중기중앙회장을 연임한 김 회장은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선거에 재출마를 선언했다. 경기불황과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중소기업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서울 송파구 제이에스티나 본사는 회사를 잘못 찾았나 싶었을 정도로 다양한 패션 제품을 생산했다. 여전히 시계가 진열돼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넓은 공간을 가방과 주얼리, 화장품 등이 차지하고 있었다. 제이에스티나가 공을 들여 키우는 패션 상품들이다.

김기문 회장을 만나 패션 전문 브랜드 제이에스티나를 운영하는 CEO로서, 그리고 중앙회 회장 출마 배경과 포부 등에 대해 들어봤다.

제이에스티나가 생산하는 다양한 패션 상품들이 본사 1층 로비 전시실에 진열돼 있다.

-로만손을 창업해 1980~90년대 국내 최대 시계회사로 키웠다. 하지만 다양한 경쟁자가 나타나고 소비자 취향도 변하면서 위기를 맞았는데 어떻게 극복했나.

"2000년도 초반에는 휴대폰이 보편화되면서 소비자가 시계 기능을 휴대폰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 때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중국과의 인건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해 한국 시계업체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한국 시계산업의 존립을 위협받던 시기다.

살아남기 위해 변신이 필요했다. 먼저 주얼리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주얼리는 세공 기술면에서 시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시계를 만들면서 축적한 기술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주얼리를 만들면서 회사명까지 제이에스티나로 바꿨다. 이후 가방, 화장품까지 사업을 확장했는데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회사명 제이에스티나는 어떤 의미인가.

"2003년 론칭한 제이에스티나(J.ESTINA)는 실존한 이탈리아 공주이자 불가리아의 왕비였던 조반나 에스티나의 이야기에서 착안했다. 론칭 당시 시장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브릿지 주얼리(Bridge Jewelry)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브릿지 주얼리는 예물 중심의 파인 주얼리나 저가의 코스튬 주얼리가 아닌 골드와 실버를 메인으로 사용하며 패션 트렌드를 반영한 제품군이다.

공주의 상징인 티아라는 브랜드 심볼이다. 공주의 라이프 스타일을 콘셉트로 스토리를 불어 넣어 지속적으로 제품을 출시하고, 브랜드 가치를 유지해 단단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김기문 회장은 사업초기부터 지금까지 해외 전시회를 찾아 제품을 소개한다. 사진은 김기문 회장이 해외바이어들에게 제이에스티나에서 만든 보석을 소개하는 모습.

핸드백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핸드백 시장은 주얼리보다 훨씬 크다. 큰 고기를 잡으려면 큰 바다로 나가야 한다. 제이에스티나의 브랜드 이미지를 핸드백이라는 상품군에도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핸드백 사업도 중국을 집중 공략했다. 브랜드의 가치와 디자인으로 승부를 거는 전략을 취했다. 가격도 좀 높게 책정했다. 중국에서 별도 마케팅, 홍보를 진행하지 않아도 국내에서 진행한 스타 마케팅과 실시간으로 한류 열풍에 힘입어 관광객과 현지인 사이에서 인기가 빠르게 상승했다.

현재 중국의 상해·마카오·푸켓·다낭·홍콩 공항 면세점 등에 진출했다. 중국 이외에도 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도 면세점 입점을 확대하고 있다."

화장품 사업은 어떻게 시작했나.

"연 매출이 2000억원에 육박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아직도 더 성장해야한다. 2017년부터 토탈 패션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화장품을 추가했다. 동남아 시장에서는 화장품 단독 매장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해외 매장이 문을 열 때마다 특별할 일이 없으면, 직접 행사에 참석한다. 아직 서툴고 어색한 그들의 모습에서 사업 초창기에 전 세계를 샘플 가방 하나 매고 다니던 저와 직원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김기문 회장(왼쪽 맨 끝에서 시계방향으로 4번째)이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이던 2014년 11월 열린 FTA민간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단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에 다시 출마하는 이유는.

"많은 중소기업 경영인들이 어려움을 성토하면서 우리 앞에 닥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내가 앞에 나서줬으면 좋겠다고 거듭 권유했다. 과거 8년간 중기중앙회장을 지냈는데 재임 시절 ‘희망수량낙찰제`와 `마스(MAS·다수공급자계약)` 제도를 성공적으로 도입했다.

2007년 출범시킨 노란우산공제도 이제 누적 부금액만 8조원이 넘을 정도로 안착됐다. 서울 상암동 중소기업DMC타워와 부산·대전 중소기업회관 건립, 노란우산공제, 홈앤쇼핑 출범 등도 회장 재임시절 한 일들이다."

희망수량낙찰제는 중소기업이 생산능력에 따라 원청기업이 희망하는 수량과 단가를 입찰하는 제도다. 다수공급자계약은 최저가 1인 낙찰자 선정 방식이 품질 저하 등의 문제점이 지적됨에 따라 다수의 공급자를 선정해 가격과 품질 경쟁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다시 중앙회 회장이 되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중기·소상공인이 매우 어려운데 이들을 대변해야 할 중기중앙회가 '식물 중앙회'라는 말까지 듣고 있어 가슴이 아프다.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무제 등의 현안에 대해서는 중소기업이 감내할 수 있는 선에서 최저임금을 인상해야 하는데 지금 정책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현재 3개월인 탄력근로제는 1년으로 연장해 중소기업의 부담을 완화해줘야 한다.
제2의 개성공단도 만들자고 주장할 계획이다. 2004년 개성공단에 진출한 이후 10년간 공장을 가동했다. 북한 근로자들도 숙련도가 높아졌는데, 2년 전 공장 문을 닫게 돼 설비 손실뿐만 아니라 무형의 피해가 컸다."

김 회장은 제1대 개성공단기업협회장이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수행해 `10·4 공동선언`을 지켜봤으며, 개성공단 조성에 기여한 공로로 은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