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금융사 임원 A씨는 올해도 얼마일지 모를 '청구서'를 기다린다. 회사가 매년 수십억원씩 내지만 통보가 올 때까진 얼마일지 모르고, 올라도 막상 왜 올랐는지 설명조차 없다. 그렇다고 "왜 올랐나요"라고 물을 수도 없다. 돈을 걷는 기관이 금융사들의 명줄을 쥔 금융감독원이기 때문이다.

금감원이 제공한 '감독 서비스'에 대한 대가인 감독 분담금은 매년 이런 식으로 3월 중에 금융사에 전달된다. "매달 떼가는 세금이 왜 그렇게 많은 건지 이유라도 아는 월급쟁이만 못하다"는 게 A씨의 푸념이다. 이미 연초에 한 해 씀씀이를 정해둔 금융사들 입장에선 3월에야 오는 수십억, 수백억원에 달하는 분담금 '청구서' 탓에 실적을 관리하는 데도 애를 먹는다.

윤석헌 금감원장

금융사들이 금감원에 내는 돈은 작년 2800억원을 넘겼고, 올해도 이 수준과 비슷할 것이라고 한다. 2014년엔 2000억원에도 못 미쳤는데 불과 5년 만에 1000억원 가까이 오른 셈이다. 일반 제조업 회사들에 이런 식으로 돈을 걷는다면 '원칙 없는 악성 규제'라고 벌써 난리가 났을 것이다. 금감원 위세(威勢) 탓에 금융업계가 쉬쉬하던 이 문제가 작년부터 금융위원회가 금감원 예산에 대한 통제권을 일부 행사하면서 처음 수술대에 올랐다. 금융위는 지난달 말 "분담금 부과와 징수 방식을 전면 개선하겠다"며 이 분야 민간 교수 6명에게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하반기까지 해법을 내겠다는 입장이다.

◇'서비스'한다며 금감원 편의가 최우선

금융계에서 금감원 감독 분담금을 최악(最惡)의 규제이자 제 밥그릇 챙기기로 비판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가 매년 얼마가 왜 오르고, 어디에 쓰이는지 금융회사들이 통보를 받을 때까지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익명을 요구한 대형 금융회사 관계자는 "회사는 이미 한 해 예산을 다 정했는데, 매번 큰 폭으로 오른 분담금이 덜컥 통보되는 일이 반복된다. 아예 일정액을 분담금 용도로 떼어두지만 (회사 운영에) 애로가 많다"고 했다. 둘째가 소수의 대형 금융사에 분담금 부담이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금감원이 걷기 쉽게 대형사에만 손을 벌리는 것이다. 당연히 형평성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지금은 순이익 50억원이 안 되는 금융회사는 분담금을 한 푼도 안 낸다. 익명을 요구한 시중 금융사 임원은 "월급쟁이가 1억원을 벌어도 1000만원 넘게 세금을 내는데, 금융회사가 50억원을 못 번다고 분담금을 안 내는 게 말이 되느냐"며 "금감원 편의대로 분담금을 면제해 주다 보니 돈벌이가 쏠쏠한 알짜 회사 중에도 돈 한 푼 안 내는 사례가 수두룩하다"고 했다.

대형사에만 집중되는 감독 분담금은 금융사별 액수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4대 은행은 모두 150억원이 넘는 분담금을 낸다. 삼성생명은 159억원, 삼성금융계열사 전체 분담금은 300억원에 육박한다.

업권별 대형 금융사들이 내는 돈으로 분담금의 대부분이 채워진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사고나 문제를 일으키는 금융회사들은 중소형사들도 많다"며 "금감원의 '감독 서비스'로 혜택을 보는 금융회사 따로, 비용을 부담하는 회사 따로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금융위, "분담금 산정 방식 새로 만들 것"

금융위는 금감원이 감독 수요자인 금융회사들에 제공한 '서비스'에 근거해 분담금을 정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인건비와 운영비만큼 마구잡이로 돈을 걷어 왔다고 보고 있다. 매년 연공서열에 따라 인건비가 급격히 불어나는 금감원 직원들의 월급을 금융회사들이 고객의 지갑에서 나온 순이익을 헐어서 대신 올려주고 있다는 말이다. 금융위는 작년부터 분담금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초기엔 금감원이 개선안을 논의하는 데 금융회사들이 참여하는 것조차 반대했다. '금융 당국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를 댔다고 한다. 한 금융사 고위 관계자는 "말로는 서비스라면서 (금감원이) 웬만한 정부 부처보다 더 고압적"이라고 했다. 금융위는 늦어도 올 하반기 중엔 개선안을 낼 예정이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다음 해 분담금이 얼마나, 언제 부과되고, 왜 오른 건지 근거를 투명하게 금융회사들이 알 수 있도록 부과 체계를 바꾸고, 탄탄한 수익을 내는 중소형 금융사는 적은 금액이라도 분담금을 내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감독분담금

감독분담금이란 금융감독원이 조직 운영을 위해 은행, 증권, 보험사 등 금융사들에 '감독 서비스 수수료' 명목으로 매년 걷는 돈을 뜻한다. 3월 중에 금융사에 금액이 통보되고, 금감원은 매년 예산의 4분의 3 이상을 분담금을 걷어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