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는 2013년 수소전기차 '투싼FCEV'를 세계 최초로 양산에 성공했다. 세계 최고 기술을 확보했지만 정작 수소차 보급은 5년이 넘도록 진척이 없었다. 규제 벽에 막혀 필수 인프라인 수소 충전소를 도심에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1일 정부가 '규제 샌드박스'에 도심 수소 충전소 설치를 포함시켜 신(新)산업 활성화를 위한 규제 개혁의 첫 물꼬를 트면서 이 장벽이 걷히게 됐다. 규제 샌드박스는 어린이가 모래 놀이터에서 마음껏 뛰노는 것처럼 규제를 면제하거나 유예해 신기술이 적용된 제품이나 서비스가 시장에 신속히 출시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다.
◇도심 수소 충전소 6년 만에 풀려
프랑스 파리 에펠탑 인근 알마광장에, 일본 도쿄 랜드마크인 도쿄타워 근처에 수소 충전소가 운영되고 있다. 수소 충전소는 그만큼 기술적 안전성이 확인돼 있지만 서울에는 도심이 아닌 양재동과 상암동 두 곳에만 겨우 설치돼 있고 전국을 통틀어 11개소가 전부다.
도심에 수소 충전소를 짓기 위해서는 첫 과정인 부지 확보에서부터 5겹의 규제를 뚫어야 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유치원·대학 등 학교 부지로부터 200m 이내 부지에는 충전소 설치가 안 되고, 전용주거지역·상업지역·자연환경보전지역 등에는 애초 설치가 불가능하다.
현대차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여의도 국회, 양재동 수소 충전소, 탄천과 중랑의 물재생센터, 종로구 현대 계동 사옥 등 서울 도심 5곳에 충전소 설치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고, 심의위는 공공주택이 보급될 예정인 중랑 물재생센터를 제외한 4곳에 설치를 허용했다. 성윤모 산업부 장관은 "각종 민원과 규제로 수소 충전소 부지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세계 최초로 국회에 설치하는 수소 충전소는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전광판 광고 단 버스, 지하 주차장에서 전기차 충전
현재 버스 바깥 면에 LCD 등 빛을 이용한 광고는 금지돼 있다. 다른 운전자 차량 운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심의위는 제이지인더스트리가 신청한 규제 샌드박스 건에 대해 안전성 문제가 없는지 검증하고, 광고 조명과 패널 부착에 따른 버스 무게 증가에 상한을 두는 조건으로 허용을 결정했다. 조재만 대표는 "규제가 완전히 풀리길 바라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없지 않으냐"며 "앞으로 실증 과정에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전기차용 충전 설루션 업체 차지인이 개발한 '전기차 충전 콘센트'가 임시 사용 허가를 받으면서 민간 기업이 전기차 충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전기차 충전 콘센트는 아파트나 빌딩에 설치된 220V 전기 콘센트를 활용하고, 전기요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한 '전기 자판기'다. 지금까지는 플러그 형태 충전기를 갖춘 경우에만 사업자 등록이 가능하다. 산업부 관계자는 "기존 전기차 충전기 설치에 400만원이 들지만 30만원 정도 하는 이 콘센트를 활용해 충전 서비스가 가능해지면서 전기차 충전 인프라 확대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민간 업체에서도 유전자 검사를 통해 고혈압·뇌졸중·대장암·위암·파킨슨병과 같은 중대 질병 발병 여부를 체크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는 민간 유전자 검사 업체에서 검사받을 수 있는 항목은 혈당, 혈압, 피부 노화, 체질량 지수 등 질병이 아닌 건강과 관련된 12개로 제한됐다. 규제 완화를 신청한 마크로젠은 우선 인천경제자유구역에 거주하는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2년간 실증 사업을 추진해 유전체 검사와 질병 사이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를 검증하게 된다.
◇"보여주기식 규제 완화 그쳐서는 안 돼"
규제 샌드박스는 특정 기업의 제품·서비스를 검증하는 동안 제한된 구역에서 규제를 없애주는 임시 조치에 불과하다. 관련 산업 자체를 키우기 위해서는 법령 개정 등 근본적인 규제 개혁이 이어져야 해 앞으로 넘어야 할 산도 적지 않다. 수소 충전소의 경우 산업부는 상반기 내에 상업·준주거 지역에 설치가 가능하도록 국토계획법 시행령을 개정하고, 서울시 조례를 개정한다는 방침이다. 또 도심 수소 충전소 보급에 걸림돌이었던 운전자 셀프 충전, 충전소 설치 거리 규정도 완화하고, 3000㎥ 초과 수소 충전소도 도시계획 시설 결정 없이 설치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한다는 계획이다.
규제 샌드박스 첫 승인을 통해 규제 완화의 물꼬를 텄지만 보여주기식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태윤 한양대 교수는 "규제 샌드박스가 기업들에 일시적인 강장제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벤처 기업이나 스타트업의 실질적인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산업계가 요구해온 '선(先) 허가, 후(後) 규제'라는 규제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