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서울 이태원의 A운동화 편집매장에서 중학생 2명이 6만9000원짜리 운동화 '디스럽터2'를 망설임 없이 집어들었다. 스포츠 의류 기업 휠라가 내놓은 이 운동화는 1997년에 선보였던 '디스럽터'를 20년 만에 재출시한 '리바이벌' 상품이다. 휠라는 2~3년 전부터 1990년대 디자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른바 '어글리 슈즈'를 내놓으며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디스럽터2'는 출시 1년 반 만에 국내 180만 켤레, 해외 820만 켤레 판매고를 올렸다. 아디다스의 대표 운동화 '스탠스미스'가 연간 800만 켤레 팔리는 것과 비교하면 놀랄 만한 실적이다. 2004년생 정태연양은 "어글리 슈즈 때문에 휠라를 알게 됐는데 엄마·아빠 어렸을 때도 이 신발이 인기였다는 건 몰랐다"고 했다.

◇헤리티지: 혁신 강박 벗고 정체성 찾아

'아저씨'의 상징 같았던 구닥다리 브랜드에서 밀레니얼(millennial· 1980~2000년대 출생한 인구집단) 세대와 교감하는 브랜드로 변신하면서 휠라가 부활하고 있다. 1911년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휠라는 1980~1990년대까지는 나이키·아디다스·리복과 견줄 만큼 성장했지만 혁신에 뒤처지고 마케팅 전쟁에서 밀리며 2000년대 초반 파산 위기까지 몰렸다.

2007년 윤윤수(74) 휠라코리아 회장이 본사를 인수해 한국 기업이 되면서 화제를 모았지만 2013년부터 매출이 줄어 고전했다. 2016년에는 310억원의 적자(국내 기준)를 냈다. 그런 휠라가 2016년 하반기부터 출시한 운동화와 의류가 잇달아 좋은 반응을 얻으며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는 지난해 패션시장 보고서를 통해 "진부하고 낡은 브랜드였던 휠라가 1020세대가 열광하는 브랜드로 바뀌고 있다"고 평가했다. 연간 7000억~8000억원대에 머물러 있던 휠라 매출(골프 용품 제조 계열사 아쿠쉬네트 실적 제외)은 2016년 개편을 통해 이듬해 9000억원대로 껑충 치솟았다. 증권업계는 휠라의 지난해 매출이 1조원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지금까지 이런 변신은 없었다… 아재 패션인가, 할리우드 패션인가 - ‘아저씨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스포츠 의류 브랜드 ‘휠라’가 1020 세대와 교감하는 브랜드로 변신했다. 해외 유명인사가 휠라의 옷과 신발을 걸치고 등장하는 경우도 최근 많아졌다. ①신디 크로퍼드의 딸이자 모델인 카이아 거버(18)가 휠라를 입고 다니는 모습. ②가수 비욘세(38) 등 걸어다니는 광고판인 이들의 착용 사진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순식간에 퍼지면서 젊은 세대가 반응했다. ③휠라가 20년 전 디자인을 재출시한 운동화 ‘디스럽터2’는 1년 반 만에 1000만 켤레가 팔렸다.

침체된 패션 업계에서 휠라는 어떻게 재도약의 기회를 잡았을까. 휠라는 2016년 이전에도 끊임없이 신상품을 내놨다. 그러나 시류(時流)에 뒤처지지 않으려던 강박이 브랜드 정체성을 흔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2010년 운동화 업계에 신체 균형을 잡아준다는 '토닝화'가 등장하자 미세 전류가 흐른다는 '이온 토닝화'를 내놨고, 2011년엔 '맨발 보행'이 주목받자 발가락 양말처럼 생긴 '스켈레토즈화'를 출시했다. 아웃도어가 한창 떴을 땐 '전문가용 등산화'(2013년)와 다이얼을 돌려 끈을 조이는 '보아 트레킹화'(2014년)를 내놨다. 그러나 이런 제품들 때문에 휠라를 찾는 소비자는 드물었다.

2015년 말 윤윤수 회장은 아들 윤근창(44) 대표에게 "다른 브랜드가 흉내 낼 수 없는 100년 역사를 내세운 '헤리티지(heritage·유산) 상품'으로 승부수를 띄우자"며 대대적인 브랜드 개편을 주문했다. 1980년대 테니스 선수 비에른 보리의 반팔 셔츠, 1990년대 NBA 선수 그랜트 힐의 농구화에 휠라 브랜드의 정수가 담겨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휠라에 대한 브랜드 충성도를 높이려면 이런 '향수(鄕愁)'를 새롭게 해석한 상품이 필요했다. 2016년 9월부터 옛 디자인을 참고하거나 복각(復刻)한 제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밀레니얼: 낯설어서 특별한 브랜드

반응은 놀라웠다. 부모 세대와 달리 휠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모르는 1020 소비자들이 마치 유물이라도 발굴한 듯 사들이기 시작했다. 100년 된 스포츠 브랜드가 낯설다는 건 이들에게 특별함을 의미했다.

대박의 징조는 미국에서 먼저 터졌다. 2017년 초 미국의 톱 모델 켄들 제너(24)가 한 패션쇼에 휠라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찍힌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고, 가수 비욘세·리애나도 잇따라 휠라 옷을 입고 나왔다. 지난해 초에는 명품 브랜드 펜디가 휠라와 협업 상품을 내놨다.

미 시사주간지 뉴요커는 최근 "이제 맨해튼 길거리의 모든 '패션 키즈'가 크고 투박한 휠라를 걸치고 있다"며 "휠라는 현대적 트렌드와 1990년대 향수를 활용할 수 있는 완벽한 위치를 찾아냈다"고 보도했다. 나이키처럼 알려진 브랜드가 아닌 색다른 상품을 찾던 10대 소비자 눈에 미지(未知)의 휠라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스트리트: 프리미엄 버리고 길거리로

외국 반응은 소셜미디어를 타고 순식간에 국내 시장으로 번졌다. 휠라는 밀레니얼 공략을 위해 프리미엄 전략을 버리고 2016년 하반기부터 가격을 낮췄다. 과거 각종 ‘아재’ 기능성 운동화는 18만~21만원에 달하는 고가였지만 현재 인기 운동화 ‘코트 디럭스’ ‘디스럽터2’ ‘바리케이드XT97’은 6만9000원이다. 중국 푸젠성 진장 지역의 ‘휠라 글로벌 소싱센터’를 통해 단가를 낮췄다.

유통망도 중·장년층이 주로 찾는 백화점·가맹점에서 대형 편집숍·온라인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휠라는 지난 2년간 국내에서 ‘켄들 제너 티셔츠’와 비슷한 2만8000원짜리 티셔츠를 온라인·편집숍에서 75만장, 210억원어치를 팔았다. 휠라 측은 “지난해에는 신제품 출시일에 중고생들이 매장 앞에서 밤새 줄을 서기도 했다”며 “우리도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휠라는 뉴트로(new+retro·새로운 복고) 열풍을 창조한 ‘시장 개척자’는 아니지만 ‘한물갔던’ 브랜드가 상품, 가격, 유통 전략의 대전환을 통해 기회를 되살렸다. 휠라의 성장세가 계속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