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일본 도쿄시 시오도메(汐留) 빌딩 소프트뱅크 본사. 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는 떨리는 마음으로 손정의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그는 손 회장이 5개월 전 던진 질문에 답해야 했다.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에 취임하고 무거운 숙제를 받았습니다. 소프트뱅크가 초기 단계 투자를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었죠. 해야 한다면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방향으로 해야 할지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적지 않은 시간 밤잠을 설쳤죠."

손 회장의 질문은 핵심을 관통하는 것이었다. 소프트뱅크는 2017년 세계 최대 규모 기술 투자 펀드인 비전펀드(약 100조원 규모)를 조성했다. 2016년 전 세계 벤처캐피털(VC) 투자금과 맞먹는 초대형 펀드다. 소프트뱅크가 스타트업 초기 단계에 투자하는 벤처 펀드를 별도로 굴려야 한다면 적절한 근거가 필요했다.

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

이 대표는 고민 끝에 "작은 기업이 성장해 결국 큰 기업이 된다"는 답을 내놨다. 창업가들과 일찍부터 상호작용하면 훗날 소프트뱅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젊은 창업가들은 당신이 뿌린 씨앗을 마음속 깊이 간직할 것이다. 그들이 성장하면 세상을 바꾸게 된다"는 마윈의 말까지 인용하며 열정적으로 초기 투자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어떤 반응이 나올까 걱정했는데 ‘이런 생각, 이런 얘기를 해줘서 정말 고맙다. 이 생각과 마음 변치 않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깜짝 놀랐죠."

이 사건 후 소프트뱅크벤처스의 위상은 더 커졌다. 손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글로벌 스타트업 초기 투자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지난 3일엔 영문 사명도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에서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로 변경했다. 현재 운용 중인 자산 1조원에 더해 최대 5000억원 규모의 신규 펀드도 곧 설립할 계획이다. 새해 새로운 청사진을 준비 중인 이 대표를 지난 7일 서울 서초동 소프트뱅크벤처스 본사에서 만났다.

◇ "만나 주세요" 무작정 전화...연쇄 창업가에서 투자자로

-카이스트 3학년 때 처음 창업했다.

"에빅사(Evixar)라는 PC 원격 제어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를 룸메이트, 동기들과 만들었다. 정부가 주관하는 정보통신벤처창업벤처 경진대회에 나갔는데, 덜컥 우승 상금 1억원을 받았다. 그래서 회사를 만들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소프트뱅크와는 어떻게 연결됐나.

"에빅사 제품을 팔려고 살펴봤더니 당시 한국에서 소프트웨어 유통을 가장 잘하는 회사가 소프트뱅크커머스코리아였다. 웹사이트에서 이 회사 번호를 찾아서 담당자에게 무작정 만나 달라고 했다. 사실 우리를 만나줄 필요가 없었는데 감사하게도 만나줬고, 파트너가 됐다.

그 일을 계기로 당시 소프트뱅크커머스,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를 겸직하고 있던 문규학 대표님까지 만나게 됐다. 우리를 좋게 봐주셨고, 결국 투자까지 받았다. 창업가와 투자자로 첫 연을 맺은 셈이다."

이 대표는 2004년 군 문제로 에빅사를 LG유플러스에 매각하고 곰플레이어 개발사인 곰앤컴퍼니에서 병역 의무(병역특례)를 마쳤다. 이후 장병규 4차 산업혁명위원장의 소개로 동영상 검색 기술 업체 엔써즈 창업 멤버로 합류했고 2011년 KT에 엔써즈를 매각, 2014년까지 KT 그룹에서 근무하다 이듬해 소프트뱅크벤처스에 합류했다.

지난해 소프트뱅크벤처스 투자 현황.

-창업가에서 벤처 투자가로 변신한 계기가 궁금하다.

"원래 엔써즈 매각 후 대전에 내려가서 기술 창업하는 분들 도와드리고 엔젤 투자하며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처음 창업했을 때 어디 물어볼 곳, 도움받을 데 없이 막막했던 기억이 있어서다. 대전 카이스트 주변에 연구소가 많은데, 그분들 꿈을 키워주고 도와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 대표님이 소프트뱅크벤처스 소속으로 그런 활동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시더라. 소프트뱅크는 기술 기업 초기 투자, 글로벌 사업 지원 등에 꼭 맞는 플랫폼이었기 때문에 합류를 결심했다."

-3년 만에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직을 맡았다.

"투자자로선 아직 배울 게 많다. 연륜 있는 투자자분들 만나면 항상 배울 게 많다고 느낀다.

대표가 되고 난 후 같이 일하는 파트너들과 이런 얘기를 했다. 투자자의 시각으로 소프트뱅크벤처스를 바라보자는 것이었다. ‘소프트뱅크벤처스가 스타트업이라면 어떤 회사로 만들어야 다른 투자자들이 투자하고 싶을까’란 질문을 던졌다. 창업가 마인드를 가지고 회사를 경영하려고 한다."

◇ "더 큰 꿈 키워라"...글로벌 네트워크·문화 강점

-창업가 출신 투자자의 특징이 있다면.

"창업가의 심정을 잘 안다는 점이다. 소프트뱅크벤처스는 투자 계약할 때 창업가에게 불리한 조항이든 유리한 조항이든 솔직하게 다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노력한다. 창업가들이 투자 계약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을 악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과거 창업했을 때 가장 아쉬웠던 점 중 하나는 자극과 격려였다. 꿈이 얼마나 대단한지 격려해주고 믿어 주는 게 창업가에겐 큰 힘이다. 어차피 스타트업은 실패 확률이 높다. 하지만 꿈을 얼마나 크게 꾸는지에 따라 성공 확률 차이는 크다고 생각한다."

-소프트뱅크벤처스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글로벌 네트워크와 문화가 강점이다. 글로벌 업계 리더들과 소통하며 투자한 회사들끼리 연결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프트뱅크벤처스가 투자한 동남아 중고차 거래 사이트 카로(Carro)와 소프트뱅크가 투자한 동남아 최대 차량 호출 업체 그랩(Grab)이 협력하고 있다. 우리가 투자한 스노우와 비전펀드가 투자한 중국 안면인식 스타트업 센스타임도 손을 잡았다. 세계적 반도체 설계 업체인 ARM의 르네 하스 사장을 직접 설득해 AI 스타트업 미식(Mythic) 이사회에 합류하도록 만든 사례도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그룹 회장.

-문화란 어떤 걸 말하나.

"소프트뱅크엔 창업가들 스스로 동기부여할 수 있게 밀어주고 꿈을 키워주는 문화가 있다. 투자아(twoXAR)라는 인공지능(AI) 신약 개발 스타트업이 있는데, 손 회장님이 그 회사 대표를 일본 도쿄로 부른 적 있다. 도쿄에 본사를 둔 글로벌 제약사 회장과의 미팅이었다.

하루 만에 작은 스타트업과 글로벌 제약사의 협력이 결정됐다. 미팅 끝나고 손 회장이 투자아 대표 어깨를 두드리면서 "더 큰 꿈을 키워라"고 하시더라. 감사했다. 맨손으로 출발해 세계적인 기업을 일으킨 손 회장 같은 사람이 ‘꿈을 크게 가져라, 잘 할 수 있다’고 얘기하면 큰 자극이 된다."

-투자 전략이 궁금하다.

"투자 전략은 우리가 무얼 중요하게 여기는지와 관련 있다. 얼마나 큰 꿈을 가지고 도전하느냐를 본다. 그 꿈을 열배 백배로 자극해 주는 게 전략이다. 그래서 창업팀이 중요하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제공하더라도 창업팀이 그걸 이용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최초 계획대로 성장하는 스타트업은 거의 없다. 다양한 성장 곡선을 만드는 건 결국 창업가와 창업팀의 몫이다. 크게 성장하고 있거나 이미 규모가 큰 시장에 도전하고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우려 한다. 투자 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파트너들끼리 격렬하게 토론하고, 만장일치 해야 투자한다."

◇ "5000억 규모 펀드 만들 것"...한국은 매력적인 시장

-대표 선임 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가장 큰 변화는 지난해 10월 이후 소프트뱅크벤처스가 본격적으로 글로벌 초기 투자를 책임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와 맞물려 3억달러(약 3300억원) 규모 차이나 펀드도 만들고, 북경에 지사도 만들었다. 임원급 인력 영입해 미국 투자도 강화했다. 현재 싱가포르 오피스도 준비하고 있다.

숫자로 보면 투자 규모가 2017년 800억원 수준에서 지난해 2000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구성원들 모두 엄청나게 달려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새해 중점 추진 과제는.

"올해 가장 중요한 추진 과제는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투자팀을 만드는 것이다. 투자업의 본질은 사람이다. 좋은 투자자가 좋은 창업가를 찾고 그들의 꿈을 키워 성장하도록 만든다. 한국, 동남아, 중국, 미국에 좋은 팀을 잘 구성하려고 한다.

‘소프트뱅크 액셀러레이션 펀드’란 이름으로 초기 기업 성장을 돕는 글로벌 펀드도 곧 설립할 계획이다. 펀드 규모는 대략 3000억~5000억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미 펀드 주요 출자자 일부는 확정됐다. 시리즈 B 투자를 주로 하는 펀드가 될 것 같다."

소프트뱅크벤처스가 투자한 스타트업들.

-상대적으로 한국에 소홀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결론적으론 한국 투자가 더 중요해졌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정말로 매력적인 시장이다. 글로벌화와 기존 산업 혁신, 이 두 가지를 잘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IT 인재들이 매우 많다. 최근 국가 간 언어·문화장벽이 굉장히 빠르게 무너지고 있어서 글로벌 진출도 유리해졌다. 스노우 같은 전 세계인이 쓰는 앱을 한국인 개발자들이 만들었다.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3D(3차원) 아바타 앱인 제페토(ZEPETO)는 15개국 앱 마켓 1위인데, 한국인 개발자 3명이 개발했다. 동영상 채팅 앱 ‘아자르’를 서비스하는 하이퍼커넥트는 매출 90%가 해외에서 발생한다. AI 헬스케어 스타트업 루닛은 멕시코에 진출했다."

-국내 창업 환경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은데.

"경제 성장은 둔화하고 있지만, 기존 산업이 크다는 건 장점이다. 금융-핀테크, 운송업-모빌리티(이동 수단) 등 기존 질서 중 바꿀 게 많다.

전체 소매 시장에서 이커머스(e-commerce, 전자상거래) 비중이 20% 넘는 나라는 한국과 중국밖에 없다. 한국은 이커머스 가입자가 3000만명이 넘는다. 온라인에서 거래하고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이 3000만명이란 얘기다. 디지털 결제 시장 규모는 100조원이 넘고, 모빌리티도 규제 풀리면 10조원 넘는 시장이다. 규제 때문에 안 된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변화를 가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런 사람이 세상을 바꾸고 그런 노력이 굉장히 큰 기회를 가져올 것이다. 한국 창업가들이 그런 시도를 계속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런 스타트업을 찾으려고 한다."

-개인적인 꿈이 있다면.

"중학교 때부터 프로그래밍을 했다. 어릴 때부터 기술로 새로운 세상 만들어 가는 걸 좋아했다. 이 일을 오랫동안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게 꿈이다. 이것이 한국, 더 나아가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이란 믿음으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