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벤처 산업이 미국·중국 등 주요 경쟁 국가는 물론 동남아시아에도 밀리고 있다.

미국의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 정보 업체 CB인사이츠에 따르면 13일 현재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국에서 탄생한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 기업 6곳의 가치는 238억달러(약 26조5600억원)로 한국 유니콘 기업 6곳의 가치(235억8000만달러)를 넘어섰다. 한국은 지난해 게임 업체 크래프톤(옛 블루홀)과 음식 배달 업체 우아한형제들(배달의 민족), 간편 송금 서비스 업체 비바리퍼블리카(토스) 등 3곳을 유니콘 목록에 추가했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에만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일본 도요타, 한국 현대차 등으로부터 27억달러(약 3조원)를 끌어모은 동남아 최대 차량 호출 서비스 업체 그랩, 2억6000만 인구의 인도네시아 전자상거래 시장을 장악해가고 있는 토코피디아·부칼라팍 등 동남아 스타트업들의 무서운 성장세에 밀려 버렸다.

동남아서 우버 누른 차량 공유 서비스 '그랩' - 동남아 최대 차량 호출 서비스 업체 그랩의 운전자가 싱가포르에서 영업하고 있는 모습.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국은 경제 규모가 한국의 1.7배, 1인당 소득은 한국의 7분의 1 수준이지만, 그랩을 비롯한 이 지역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을 넘긴 초기 벤처기업) 6곳 가치는 한국 유니콘 기업 6곳을 넘어선다.

아세안 10국은 다 합쳐도 경제 규모가 한국의 1.7배, 1인당 소득은 한국의 7분의 1 수준인 4444달러에 불과하다. 이 지역들은 5년 전까지 유니콘 기업을 하나도 탄생시키지 못한 벤처 불모지였지만 단시일에 한국을 따라잡고 있는 것이다. 이병태 한국과학기술원(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한국 스타트업들이 겹겹이 쌓인 규제 속에서 사업을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헤매는 동안 상황이 역전된 것"이라며 "한국은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동남아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고 말했다.

◇동남아 유니콘 약진 비결은 無규제

동남아 유니콘들은 기술이나 사업 방식 면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는 기업들이다. 그랩과 인도네시아의 고젝은 스마트폰 앱으로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호출해 이용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국 우버의 차량 공유 서비스를 현지화한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토코피디아와 부칼라팍은 미국 아마존과 비슷한 전자상거래 서비스를 제공하고 트래블로카는 미국 익스피디아나 호텔스닷컴처럼 온라인으로 항공권과 숙박, 여행 상품을 예약하는 사이트를 운영한다. 창업 시기도 2010년 전후로 한국 유니콘과 엇비슷하다.

한국과 달랐던 점은 이 업체들이 사업을 시작하고 확장하는 데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랩이 2012년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 서비스 지역은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1곳, 소속 기사는 4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듬해 필리핀과 싱가포르, 태국에 진출했고 지난해 말까지 동남아 8국 220여 도시로 늘렸다. 이 나라들 중에서 기존에 없던 사업 방식이라는 이유로 사업 허가를 오래 끌거나 사업을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오토바이 호출 서비스를 주력으로 하는 고젝은 마땅한 직업이 없던 사람들도 오토바이만 있으면 돈을 벌 수 있게 해준다는 이유에서 진출하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아세안 국가 간 무역·투자 장벽이 낮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동남아 유니콘들은 한 국가에서 소규모로 사업을 시작하더라도 성공을 거두면 곧바로 인접국으로 진출해 규모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2012년 인도네시아 국내선 항공권 예약 사이트로 시작한 트래블로카는 6년 만에 태국·베트남·말레이시아·싱가포르로 진출해 취급 노선 수를 20만개 이상으로 늘렸다. 트래블로카는 은행과 신용카드 회사 계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동남아 지역 사용자들을 위해 각국 통화로 40가지가 넘는 결제 방식을 지원하면서 동남아 시장 전체에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현지 성공 기업이 스타트업 열풍 이끌어

큰 성공을 거둔 기업들이 속속 나타나자 동남아 전체에서 스타트업 열풍이 일고 있다. 구글과 싱가포르 국부 펀드 테마섹이 공동으로 작성한 '동남아시아 인터넷 경제 2018'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동남아에서 기업 가치가 1000만달러(약 112억원)를 넘긴 장래의 유니콘이 2000곳 이상이다. 싱가포르 벤처캐피털·사모펀드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1~8월 동남아 스타트업에 31억6000만달러(약 3조5300억원)가 투자됐다. 동남아 최대 유니콘 그랩은 지난해 6월 자체 벤처 투자 회사를 차리고 제2, 제3의 그랩 육성에 나섰다.

동남아 유니콘들은 차량 호출 서비스 사용자의 동선, 음식 배달 서비스 고객의 주문 기록 등 동남아 수억 인구의 소비에서 나오는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으며 서비스를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김창경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교수는 "공유 경제 같은 플랫폼 사업은 일단 주도권을 잡은 기업이 점점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된다"며 "규제 때문에 한국 공유 경제 기업들이 성장을 방해받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외국 기업들과의 격차만 벌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