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는 보헤미안들이 즐겨 찾는 도시다. 어딘가에 속해있으면서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아웃사이더들, 영혼이 지친 자들, 자신의 삶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도시가 프라하다. 물론 원래의 보헤미아는 프라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체코의 서북쪽, 독일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지방을 가리킨다.

도심 한복판으로 몰다우 강이 흐르고 카를 다리를 건너 프라하 성으로 올라가는 프라하는 냉전이 끝난 뒤 가장 인기 있는 동구권의 도시가 되었다.

스메타나의 교향곡 ‘몰다우’의 운율처럼 아름다운 몰다우 강(체코어로는 블타바 강)이 흐르고, 카를 다리를 건너 프라하 성으로 올라가는 아기자기한 언덕길에 이르기까지 놓칠 것이 없다.

붉은색 지붕을 자랑하는 구시가지는 2차대전때 폭격에서 살아남아 ‘황금의 도시’, ‘백탑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다. 여행자의 눈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도시이건만, 평생 이 도시로부터 탈출을 꿈꿨던 보헤미안이 있다. 작가 프란츠 카프카다.

카프카는 1883년 프라하에서 태어나 그곳에 뼈를 묻었지만 죽을 때까지 이 도시의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분명 체코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독일어로 말하고 글을 썼으며, 핏줄은 유대인이었다. 그의 정신세계는 항상 베를린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결과 독문학의 역사에 카프카만의 매우 독특한 문체를 남겼다.

"나는 키에르케고르처럼 어떻든 매우 쇠퇴해 버린 기독교에 의하여 이끌려 살아온 것도 아니거니와, 또 시오니스트들처럼 유대교라는 법의(法衣)의 옷자락에 매달려 온 것도 아니다. 나는 종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시작인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이름의 안내 간판. 카프카는 프라하 최고의 브랜드다.

카프카가 살았을 당시 프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탓으로 독일어와 체코어라는 두 개의 언어권이 공존하였다. 상류층 인사들은 모두 독일어를 사용했다. 게다가 동구권의 유대인들은 독일어와 히브리어, 토착어가 뒤섞인 ‘이디시’어를 사용하기도 했으니 그는 3개의 언어권에 둘러싸여 있었다.

[[미니정보] 프라하와 유대인]

그런 이유로 카프카는 한때 프라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무시당했다. 그것은 좌절된 프라하의 봄을 겪은 뒤 파리로 망명해 프랑스어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 밀란 쿤데라의 처지와 같다. 그 역시 모국 체코에서는 사랑 받지 못하고 외면 받고 있으니까.

"카프카가 없는 프라하는 모차르트가 없는 잘츠부르크와 같습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때부터 체코 작가협회를 이끌었으며, 카프카의 명예회복을 추진해왔던 독문학자 에두아르트 골드스튀커의 말이다. 프라하에서 카프카라는 이름은 티셔츠에서부터 커피 잔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브랜드다.

시청을 중심으로 한 구시가지 광장. 카프카 아버지의 상점, 생가와 그가 다녔던 학교 등이 이 반경 500미터를 넘지 않았다.

카프카의 생활영역은 훗날 베를린을 방문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평생 구시가지 시청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를 넘지 않았다. 아버지였던 헤르만 카프카가 운영하던 상점 건물 역시 그 광장에 있었다. 시청 광장의 집 창문에서 카프카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여기에 나의 중고등학교가 있고, 저기 저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내가 다니던 대학교, 그리고 조금 더 왼쪽에는 나의 사무실이다. 이 조그만 원 안에 내 인생 전체가 봉쇄되어 있다."

카프카가 생전에 애용했던 곳은 카페 ‘슬라비아’(Slavia)였다. 슬라비아는 시인 릴케가 두 번이나 책에서 언급하였고, 작곡가 스메타나도 애용하였던 곳이다. 작가이자 공산주의 붕괴 후 초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었던 바츨라프 하벨의 단골 카페로 유명하다.

프라하는 파리, 빈, 베네치아와 더불어 대표적인 카페 문화의 도시였다. 슬라비아뿐 아니라 '아르코'(Arco), ‘유니언’(Union), ’밀레나(Milena) 같은 카페도 프라하 지식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카프카와 프라하 지식인들의 단골 카페 ‘슬라비아’. 블타바 강가에 있다.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은 자수성가한 유대인 상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아들이 하는 일을 사사건건 못 마땅해했고 무척 권위주의적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역시 글 쓰는 것을 시간 낭비일 뿐이라 여겼다.

부모는 사회적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에 작가의 삶을 경멸하였다. 평생의 멘토 괴테와 토마스 만을 동경하여 독문학을 배우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강압에 밀려 프라하의 카렐 대학에 입학해 법을 전공하고 5년 만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대학 졸업 뒤 프라하 최고의 금융기관에 취직하였다. 하지만 감당하기 힘든 근무강도와 스트레스 때문에 곧 퇴직하고 ‘보헤미아 왕국 산재(産災) 보험청’으로 옮겼다. 이곳은 오후 2시에 업무가 종료되어 퇴근 이후 또 다른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문학청년이기는 하였지만 태생적으로 성실한 성격이어서 14년 직장생활 동안 낮에는 자기 직무에 충실했다. 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3시부터 저녁 7시까지 잠을 자고, 밤 11시부터 새벽 3시까지 글을 썼다고 한다.

카프카는 억눌리고 비틀린 삶 속에서도 힘겹게 글을 썼다. 그의 글들은 군더더기 없다. 곧바로 핵심으로 돌진한다. 스무 살의 나이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너무도 유명하다.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으로 머리 정수리에 일격을 가해서 각성시켜주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책을 읽겠는가?"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네."

도발적 질문이었다. 도끼는, 창조적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외면할 수 없는 본질적 질문이다. 카프카는 일상의 직업을 가리켜 ‘빵 값 버는 직업’(Brotberuf)’이라 불렀다. 낮에는 직장인, 퇴근 후 밤에는 글 쓰는 작가라는 분열된 자아였다.

생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은 직장에 있어야 하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다른 곳을 갈망하고 있었다. 심야의 골목을 산책한 뒤 후미진 자기 방으로 돌아와 밤새 글을 썼다고 한다. 항상 탈출을 갈망하였기에 그의 소설은 신비하고도 몽환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언제나 프라하 탈출을 꿈꿨던 카프카의 청년시절 모습.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잘 알려진 것처럼, 카프카는 평생 아버지와 가치관이 충돌했다. 강한 아버지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아들의 문약한 모습은 소설 ‘변신’의 주인공 게오르그 잠자로 표현되어 있다. 소설 ‘변신’의 첫 문장은 너무도 유명하다.

"어느 날 아침 이상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그가 거대한 벌레로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안에서 스스로를 흉측한 벌레로 느꼈던 주인공의 모습은 자기의 방안에 내적인 망명을 하여 글쟁이로서 삶을 이어가야 했던 카프카 본인의 자화상이었다.

프라하를 방문한 카프카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곳이 한곳 있다. 프라하 성 근처에 길이 100미터에 불과한 작은 골목이다. 이곳을 가리켜 ‘황금소로’(黃金小路), 영어로 Golden Lane이라 부른다. 원래는 연금술사들이 몰려 살아 그런 이름이 붙어있지만, 20세기 들어서는 체코의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여기에 몰려 살았다.

이 좁은 골목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22번지의 하늘색 집이다. 원래 카프카의 막내여동생이 살던 집이었는데, 마침 비게 되자 카프카는 작업실로 사용하였다. 너무도 비좁아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할 정도였지만, 카프카에게는 엄격한 부모로부터의 해방, 시민적인 안락한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였다.

비록 단기간이었지만 마침내 홀로 있을 수 있었다. 여기서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와 같은 몇 권의 작품을 탈고하였다. 폐결핵 발병으로 인해 그는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까지 자유를 누렸다.

황금소로의 22번지 하늘색 작은 집이 카프카의 임시 집필실이었다.

결국 그 폐결핵이 원인이 되어 41살의 나이에 카프카는 세상을 떠난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곳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 근교였다. 운명의 도시 프라하는 그러나 그가 죽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아 결국 프라하에 묻혔다. 그가 일기장에 기록한 것처럼 매정하리만치 꽉 움켜쥐고 있었다.

"프라하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발톱을 갖고 있는, 어머니 같은 고향 땅이여!"

카프카처럼 오늘날 많은 직장인들은 분열된 두 개의 자아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글을 쓰던, 그림을 그리던, 혹은 음악을 하던, 또는 공방을 꾸미던 상관없다. 투 잡, 쓰리 잡, 카프카처럼 살고 있다. 비록 현실의 영역에서는 속물로 살고 있더라도 영혼만큼은 창조적인 삶을 추구한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이 시대의 또 다른 카프카로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프라하에 출장을 떠난다면 카프카의 발자취를 따라 안개에 젖은 프라하의 밤거리 골목 구석구석을 걸어보기를 권한다. 이 도시의 진정한 백미(白眉)는 바로 거기에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