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4일 오후 2시, 덴마크 코펜하겐에 위치한 코펜하겐대학 릭스왕립병원(Rigshospitalet) 1층 로비에 들어서자, 한국 병원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릭스왕립병원 1층 로비는 '오늘 병원 운영을 안 하나'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한산했다. 1층 로비 한쪽에서 어린이환자를 위한 행사를 준비하는 10여명의 직원들을 빼고는 환자와 방문객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26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릭스왕립병원은 1500병상, 약 8000명의 직원을 보유한 덴마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전문화된 의료인력이 있는 종합병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등 상급종합병원에 해당한다.
하루에만 전국 각지에서 1만여 명의 외래 환자가 방문하는 서울아산병원,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등 국내 주요 상급종합병원의 1층 로비는 그야말로 환자와 보호자, 방문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로 인해 환자의 진료·입원·수술 대기, 의료인력의 업무 과중, 공간 부족 등 만성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
코펜하겐 릭스왕립병원 관계자는 "현재 병상가동률은 88% 수준으로, 불필요한 입원을 줄이고 중증도가 높은 환자들의 치료율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주요 목표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어 "이와 함께 환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혁신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 암 환자 집에서 치료…"환자 만족도 높이고 입원일은 줄이고"
릭스왕립병원에서는 2015년부터 일부 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자신의 가정에서 항암화학요법(chemotherapy) 치료를 일부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다.
피터 아가드 닐슨(Peter Agaard Nielsen) 릭스왕립병원 혁신(Change and Innovation)팀장은 "이전에는 환자가 10일 내내 병실에 있어야 했다면 지금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2~3일만 병원에 내원해 치료 받는 식이 됐다"며 "많은 환자가 실제로 병원보다 집에서 치료를 받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릭슨왕립병원 백혈병 부서 의료진과 직원들은 2013년 재가 화학요법 치료에 대한 위험성 여부를 조사한 뒤 가정과 병원 간 상호 통합할 수 있는 디지털 솔루션을 설계해 가정에서도 화학요법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모델을 개발했다.
가정에서 항암치료를 받는 데 필요한 건 '작은 가방' 하나면 된다. 가방에는 정맥 치료 약물과 도구가 있는 아이브이백(IV-bag)과 함께 환자의 정맥에 약물이 들어가기 위한 시간과 양을 조절하는 주입 펌프가 들어있다.
이 가방을 환자가 집으로 가져가 착용해 투여하는 식이다. 혈관에 삽입된 미세한 플라스틱 튜브인 히크만 카테터를 통해 약물이 환자의 혈류로 들어간다. 환자 개인마다 화학요법 치료 시간은 다른데, 보통 수시간에서 길게는 11일까지 다양하다. 디지털 솔루션을 통해 투여 과정을 확인할 수 있고 환자가 임의로 약물 양을 조작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물론 모든 환자가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진이 집에서 치료가 가능한 환자 후보군을 선별하고, 환자 의사에 따라 환자 상태에 따른 충분한 설명과 처치가 이뤄진다. 의료진은 환자에게 배터리·튜브 교체법, 감염관리에 관한 교육을 하고, 의료진이 가정에 있는 암 환자와 전화 통화해 환자 상태를 살핀다.
병원에 따르면, 환자 가정에서 이뤄지는 화학요법에 대해 환자·가족들의 만족도가 높은 데다 병원 입원일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또 이전에는 환자가 잘 알지 못했던 자신의 치료 계획과 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카트린(Katrine Seier Fridthjof) 프로젝트 간호사는 "환자가 병원에 통원·입원할 필요 없이 집에서 더 편안하게 항암 치료를 받을 수 있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는 점에서도 심리적·육체적 만족감이 크다"며 "환자 삶의 질이 향상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암 환자가 병원에서 화학요법 치료를 받을 때 다른 환자와의 접촉이나 냄새 등으로 인해 구역질과 신물이 올라오는 '오심' 증상을 보이는 부작용이 심한데, 가정에서 투여하는 환자의 경우 오심과 같은 부작용이 현저히 주는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피터 아가드 닐슨 팀장은 "시행 첫해에만 입원일이 약 750일 감소했다"며 "입원 일수가 줄기 때문에 병원 입장에서도 효율성이 증대됐다"고 말했다.
피터 팀장은 "암 환자에 대한 재가 치료이므로 지역 방문간호사와 연계하지 않고, 의료의 질을 고려해 병원 내 프로젝트팀 의료진이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며 "치료 외의 사회 복지는 지역(커뮨·kommune)애서 담당한다"고 덧붙였다.
◇ 대형병원 환자 쏠림 현상 없는 덴마크의 의료체계
불필요한 입원을 줄이고 환자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는 릭스왕립병원의 사례는 덴마크의 의료전달체계를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덴마크는 1차의료(주치의·GP)와 종합병원 간 역할과 기능, 즉 의료전달체계가 정립돼있는 나라 중 하나다. 덴마크도 영국처럼 일반의(GP)가 주축인 주치의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모든 국민에게 주치의가 지정되며, 덴마크 전역 2100개소(Practice)에 3500명의 GP가 있다.
2차의료는 입원을 포함한 전문적인 병원 서비스로, 코펜하겐병원연합과 광역정부(region) 소유 병원이 중심이 돼 중증도가 높은 질환군의 환자 치료를 중점으로 한다. 주치의가 등록돼있는 지역 환자들을 연속성있게 진료·관리하고, 종합병원에서 보다 높은 난이도가 요구되는 중증 환자 치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1차(의원)-2차(중소병원)-3차(종합병원)로 의료전달체계가 구분돼있기는 하지만 주치의 제도가 없을 뿐더러 경증·만성질환 환자마저 대학병원을 선호하는 '대형병원 환자 쏠림 현상'을 겪는 등 체계가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상태다.
이러한 나라별 의료전달체계의 차이가 다양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게 세계 보건당국과 여러 학자의 지적이다.
실제 우리나라의 2016년~2017년 연간 국민의료비 증가율은 5.9%로, 덴마크의 이 기간 국민 의료비 증가율은 0.6%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간 비교를 해보면 우리나라는 국민 1인당 1년간 외래진료 빈도가 2012년부터 일본을 추월해 줄곧 1위다. 2016년 기준 한국 국민 연간 외래진료 빈도는 17회로 덴마크 4.3회의 약 4배다.
병원 입원(재원)일수도 우리나라는 2016년 기준 18.1일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입원을 오래 하는 것으로, 덴마크(5.4일)의 3.8배 수준이다. 병상 수도 과잉 공급이다. 인구 1000명당 병상 수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는 일본(13.1병상)에 이어 2위(12병상)로 OECD 평균의 2.6배 수준이다. 덴마크의 인구 1000명당 병상수는 2.6병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병상 수가 꾸준히 늘어왔지만, 대부분 변화가 없거나 감소세를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