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특정한 시기, 특정한 공간에 엄청난 천재들이 한꺼번에 출현해서 비약적인 발전이 일어났던 때가 가끔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천재들이 경쟁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그리고 렘브란트와 요하네스 베르메르 등이 맹활약했던 네덜란드의 황금의 17세기를 흔히 꼽는다.

1898년의 알마 말러. 유대인 화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본인이 음악가였으며 1900년 전후 예술가들의 애인으로, 창작의 모티브가 되어 영원한 뮤즈라 불린다.

1900년 전후 세기말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일어난 현상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기존 다른 도시들이 건축이나 디자인, 회화 등 주로 시각미술에 집중되어 천재들이 나타났다면 빈에서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창조적 파괴가 일어났다. 학문과 의학, 예술, 문학, 음악 등 거의 전 분야에서 용광로 같은 에너지가 동시에 분출되었던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다.

그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서 축적된 물적, 정신적 자본이 물론 기반이 되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빈의 세기말 현상의 한 가운데는 인간의 성욕이 자리잡고 있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성욕은 오랫동안 공개적인 언급이 금기시되던 주제였다. 퇴폐와 파멸로 이끄는 요인이라는 부정적 견해가 강했다.

1909년 동료 정신분석학자들과 함께한 프로이트(앞줄 가운데).

터부시 되던 성욕에 대해 처음으로 적극적인 연구 활동이 이루어졌던 곳이 세기말 전후의 빈이었다. 1900년 ‘꿈의 해석’이란 선구적인 역작을 펴내 정신분석학의 태두로 불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무의식의 영역을 지배하는 것은 리비도(libido)라는 이름의 성적인 욕망이며, 그 리비도가 인간의 행동을 촉발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아쇠 중 하나라는 주장을 하여 논란의 한 중심에 섰다.

같은 해 의사이자 소설가였던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인간의 규범과 신념, 위선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였고, 1906년에는 로베르트 무질이 적나라한 성행위장면을 묘사한, 반 자전적 소설 ‘젊은 퇴를레스’를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 슈니츨러의 50회 생일을 맞아서 프로이트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슈니츨러는 무시되거나 그 가치가 잘못 평가되어온 성욕을 탐구하여온 동지다."

빈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전공이나 장르에 관계없이 ‘카페 센트럴’ 같은 곳에서 모여서 긴밀하게 토론했으며 서로 자극을 주었다. 정신과 의사 프로이트는 작가 슈니츨러와 만나고, 작가 무질은 외과의사 에른스트 마흐의 이론을 언급했다. 성심리학자 바이닝거의 이론은 화가이자 희곡 작가이기도 했던 오스카 코코슈카에게 영향을 끼쳤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자신의 마음 속 갈등을 프로이트에게 상담을 받았고,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 예술가들은 말러의 관심을 받았다. 이처럼 음악가는 화가에 영향을 미쳤고, 화가는 음악가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역동성이 빈의 독특한 예술의 토양이 되었다.

성욕과 질투라는 인간 본성을 자극하여 세기말 빈의 예술을 탄생시킨 한 명의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알마 말러. 재색을 겸비한 여성으로 빈의 지식인 사회와 예술계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던 여자 주인공이다.

유대인 화가의 딸로 태어나 본명이 알마 마리아 쉰들러였던 그녀는 니체의 문장을 줄줄 욀 정도의 지성과 음악과 미술에 대한 재능이 대단했다. 설명하기 힘든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도 숨겨져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명작 ‘키스’. 알마는 클림트와 첫 키스를 나누는 등 화가, 시인, 음악가, 연극인등과 두루 사귀었다.

이미 소녀 시절에 '키스'로 유명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첫 키스를 나눈 것으로 알려진 그녀였다. 부르크 극장의 감독인 막스 부르카르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리고 스승이기도 한 작곡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에게 큰 영향을 받고 연인관계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직업은 각각 화가, 연극인, 시인, 음악가였다.

그런데 정작 결혼은 이 네 남자 가운데 한 명이 아닌 지휘자이며 작곡가였던 구스타프 말러였다. 말러는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알마 쉰들러와 결혼할 때 아름다운 곡을 선물했다.

말러의 교향곡 5번의 네 번째 악장인데, 일명 ‘아다지에토’라 부른다. 처연하고도 비극적인 선율미가 무척 아름다워서 별도로 연주되는 일이 많아서 1963년 암살당한 케네디 대통령 추도식 음악으로 사용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케스트라의 현악기와 하프만으로 꿈꾸듯 노래하는 이 곡은 두 사람의 사랑의 기념비로 남아 있다.

구스타프 말러는 알마와의 결혼식을 위해 교향곡 5번의 네 번째 악장, 일명 ‘아다지에토’라 부르는 아름다운 곡을 작곡하였다.

[[미니정보] 구스타프 말러]

말러에게 여자는 알마 한 명뿐이었지만, 그녀는 평생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많은 연애와 로맨스를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서로 질투하고 경쟁을 했으며 그 결과 위대한 작품이 나왔다.

결혼 기간 동안에도 그녀는 바우하우스(Bauhaus) 운동으로 유명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비밀리에 사귀다 남편 말러가 사망한 뒤에는 두번 째 결혼을 하였다.

바우하우스로 유명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두 번째 결혼한 알마.

그러다 그로피우스가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되어 자리를 비우자 이번에는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와 뜨거운 연애로 빈 예술계를 시끄럽게 달궜다. 3년동안 그녀의 매력에 포박되었던 코코슈카는 '바람의 신부'라는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오스카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는 알마와의 열애 중 그린 그의 대표작이다.

그런 사실이 알려져 건축가 그로피우스와 결혼 5년만에 이혼하고, 50세의 나이에 세 번 째 남편인 극작가 프란츠 베르펠과 결혼하였고, 때마침 일어난 나치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알마 말러 그녀 자신이 유대인이었으며 결혼한 3명 가운데 구스타프 말러와 프란츠 베르펠은 유대인이었다. 프로이트와 소설가 아르투어 슈니츨러도 유대인이었다. 20세기 초반 빈에는 18만 5천명의 유대인이 거주하여 주민 10명당 한 명 꼴이었는데, 특히 학술과 예술 금융분야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미국의 망명지에서 큰 성공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극작가 베르펠이 갑자기 사망을 하여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빈에서처럼 뉴욕 그녀의 집은 예술계 인사들의 살롱 역할을 했다.

그때 이 집을 찾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뉴욕 필하모니의 저명한 지휘자 레오나드 번스타인이다. 그 역시 유대인이자 토종 뉴욕 음악가였다.

번스타인은 그녀의 입을 통해 말러, 쇤베르크 등 빈의 음악과 예술을 깊이 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번스타인은 말러 교향곡 전집을 완성하는 등 말러의 음악을 20세기 중반에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알마를 통해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을 부활시킨 레오나드 번슈타인.

알마는 1964년 85세를 일기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유해는 고향인 빈으로 이송되었고 말러의 묘지로 운반되었다. 말러의 묘지 옆에 있던 딸 마농의 묘에 합장되었다. 유언으로 그녀는 자신을 알마 마리아 말러 그로피우스 베르펠로 표기해 달라고 했다.

마리아는 결혼 전 이름이고, 말러, 그로피우스, 베르펠은 생전의 남편들 이름이다. 네 남자는 각각 음악, 건축, 문학, 미술에서 세기말을 대표하는 대가들이었다. 때문에 미국의 저널리스트는 ‘4대 예술의 미망인’이라는 칭호를 붙였을 정도다.

네 남자 모두 그녀를 마음 속 깊이 안고 죽었다. 화가 코코슈카는 결혼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평생 그녀를 잊지 못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욕망은 결핍에서 나온다. 위대한 작품도 결핍에서 탄생한다. 평생 남성 편력을 하였다는 것은 내면에 무엇인가 결핍되고, 모자란 게 있다는 뜻이다. 그 결핍은 아마도 스스로 스타가 되지는 못한 데서 기인했을 지 모른다. 혹은 유대인이라는 특수성 때문일 수도 있다.

평생 스캔들로 시달린 그녀였다. 하지만 수많은 천재들의 에너지가 불타오르게 만드는 촉매 역할은 충분히 하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알마는 뮤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