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간에서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데도 수없는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 안 하는가.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는 기라."

고(故) 구인회 LG그룹 창업주는 아들 구자경(93) LG 명예회장을 현장으로 불러 경영수업을 시키며 이같이 말했다. LG는 구인회 창업주의 현장경험 중시 이념에 따라 2대 구자경 명예회장과 3대 고 구몬부 회장에 이르기까지 후계자를 대상으로 혹독한 경영수업을 했다. 철저한 장자승계 원칙에 따라 이들은 그룹 경영 능력을 기르기 위해 20년 동안 실무 경험을 쌓았다.

구광모 LG 대표이사 회장은 당초 장자가 아니었지만 2004년 큰아버지 구본무 회장의 양아들로 입적된 이후 은밀하면서도 착실하게 승계에 대한 준비를 해왔다. 지난 5월 구본무 회장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총수 자리에 오르게 된 구광모 회장은 선대 회장들에 비해 경영수업 기간이 짧다. 하지만 LG 경영 철학에 따라 국내‧외에서 현장을 두루 거치며 과장부터 차장, 부장, 상무에 이르기까지 착실하게 경험을 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광모 LG 대표이사 회장

◇ 20년 경영수업 받은 구자경·구본무 선대 회장

구 회장은 선대 회장에 비해 회사에 처음 입사해 총수가 되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짧았다. 경영수업 기간이 단축되면서 화학, 디스플레이, 통신 등 주력 계열사 근무 경력도 없다. 또 상무에서 바로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대표이사를 지내며 회사를 경영한 경험도 없다. 나이도 선대 회장이 총수 자리에 오른 시기보다 젊은 편이다.

LG 2대 회장인 구자경 명예회장은 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만25세에 부친 구인회 창업주 부름을 받고 그룹 모회사인 락희화학 이사로 취임하면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경영수업 1970년 만45세로 럭키금성그룹 회장에 취임할 때까지 20년 동안 진행됐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공장에서 현장 직원들과 함께 먹고 자며 혹독한 경험을 쌓았다.

3대 구본무 회장은 구자경 회장이 건강한 상태에서 만50세 나이로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구본무 회장은 1975년 만30세에 ㈜럭키에 과장으로 입사해 20년 동안 부장, 이사, 상무, 부사장, 부회장 등 직위를 차례로 거쳤다. 도쿄 주재원으로도 근무하다가 1985년 기획조정실 전무가 되면서 그룹 업무를 처음 맡았고, 1989년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했다. 그룹 내 주요 계열사를 두루 거치며 영업, 심사, 수출, 기획 등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 2006년 LG전자 재경부문 대리로 입사…美 뉴저지법인‧창원공장서 실무경험

구광모 회장은 2006년 LG전자 재경부문 대리로 입사해 12년간 국내외에서 제조‧판매 등을 두루 거쳤다. 2007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영학석사(MBA)를 시작했다가 이를 중단하고,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초기벤처기업) 2곳에서 1년 동안 근무하면서 정보기술(IT) 실무를 익히기도 했다.

구 회장이 가장 오래 근무한 곳은 LG전자 미국 뉴저지법인이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4년 동안 과장‧차장으로 근무하면서 재무, 영업 등을 담당했다. 뉴저지법인은 LG전자의 해외 매출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북중미 지역 총괄법인으로, 글로벌 네트워크 중심축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다. LG전자는 최근 3억달러를 투자해 뉴저지에 친환경 신사옥을 짓고 있다. 신사옥 건설은 구 회장이 뉴저지법인에 근무했을 때부터 추진했던 프로젝트로 알려졌다.

2013년 국내로 복귀한 구 회장은 LG전자 핵심인 TV부문인 LG전자 홈엔터테인먼트(HE) 사업본부 선행상품기획팀과 홈어플라이언스(HA) 사업본부 창원사업장을 두루 거치면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당시 창원 공장 기숙사에서 지내며 현장 근로자들과도 자주 어울린 것으로 알려졌다.

구 회장이 본격적인 그룹 전반에 대한 업무 파악에 나선 것은 2014년 시너지팀에 합류한 이후부터다. LG는 2012년 그룹 차원에서 주력 사업의 시너지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시너지팀을 만들었다. 구 회장은 시너지팀에서 그룹 사업 포트폴리오를 기획하고 계열사 간 시너지 효과를 높이는 업무를 맡다가 상무로 승진했다. 2017년에는 경영전략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구 회장은 올해 초 LG전자가 신성장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B2B사업본부의 ID(인포메이션디스플레이)사업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경험 시험대에 올랐다. ID사업부는 상업용 디스플레이 광고판인 사이니지를 담당하는 부서다. 지난 2월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사이니지 전시회에 참석하는 등 신사업 개척에 몰두하던 도중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구 회장은 올해 취임 후 첫 인사에서 과거 함께 근무했던 이들을 중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구 회장이 시너지팀에 근무할 때 팀장이었던 권봉석 LG전자 HE사업본부장(사장)은 이번 인사에서 MC사업본부(스마트폰 부문)까지 맡게 됐다. 사장 한 명이 두 사업본부를 운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영전략팀장이었던 유지영 부사장도 재료사업부문장에서 정보전자소재사업본부장으로 역할이 격상됐다. 구 회장이 맡았던 ID사업부장을 이어 받았던 권순황 사장은 B2B사업본부장이 됐다.

지난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한 최태원(왼쪽부터) SK 회장이 구광모 LG 회장, 이재웅 쏘카 대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을 촬영하고 있다.

◇ 경영수업 기간 이재용‧정의선보다 짧지만 정기선‧김동관보다 길어

구광모 회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등 다른 그룹 3‧4세 경영인과 비교해도 경영수업 기간이 짧은 편이다. 이 부회장과 정 부회장은 각각 삼성전자, 현대정공(현대모비스) 입사시기부터 따지면 각각 27년, 24년씩 사회생활을 했다.

이 부회장은 1991년 삼성전자 공채 32기로 입사했다. 2001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가 되면서 경영에 본격 참여했다. 2003년 상무, 2007년 최고고객책임자(CCO) 겸 전무, 2009년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부사장, 2010년 사장으로 승진한데 이어 2012년 부회장 자리에 올랐다. 2002년에는 외부인사 최초로 GE(제너럴일렉트릭)의 크로톤빌 연수원에서 최고경영자 양성과정을 거쳤다.

정 부회장은 1994년 현대정공에 과장으로 입사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대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마친 뒤 일본 이토추상사 뉴욕지사에서 경험을 쌓기도 했다. 1999년 현대차그룹에 다시 입사한 정 부회장은 자재본부 구매실장(이사), 애프터서비스(A/S), 영업, 기획 등을 거쳐 2005년 기아자동차 사장으로 승진했다. 2009년 부회장이 되면서 현대차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최근 재계 세대교체가 빨라지고 있는 추세인 만큼 구 회장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경영수업 기간이 짧은 재벌 3‧4세 경영인도 등장하고 있다. 정기선(37) 현대중공업 부사장은 2009년 현대중공업 대리로 입사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2013년 부장으로 재입사해 상무, 전무, 부사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최근에는 그룹선박‧해양영업 대표를 맡았다.

김동관(35) 한화큐셀 전무도 2010년 ㈜한화로 입사해 4년 만에 상무로 초고속 승진하고, 1년 만에 다시 전무가 된 바 있다. 이규호(34) 코오롱인더스트리 전무는 이번 인사에서 FnC부문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선임됐다. 2012년에 차장으로 입사해 6년 만에 경영 전면에 나타난 것이다.

구광모 회장은 당분간 권영수 ㈜LG 부회장, 하현회 LG유플러스 부회장 등 전문경영인 부회장단과 함께 그룹 경영을 이어갈 전망이다. 구본무 회장 때부터 함께 한 그룹 전문경영인 부회장 6명 중 5명은 이번 인사에서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