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리스크'에 미국과 일본 증시가 블랙 크리스마스로 검게 물들었다. 가뜩이나 새해에 글로벌 경기가 침체할 것이라는 'R(Recession·경기 둔화)의 공포'가 커지는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의회는 물론 중앙은행과 충돌하며 증시에 혼란을 부추겼다.

성탄절인 25일 개장한 일본 증시는 무려 5% 폭락했다. 이날 개장 직후부터 폭락세로 출발한 닛케이평균은 전날보다 5.01% 폭락한 19155.74에 마감, 15개월 만에 2만 선이 붕괴됐다. 중국 증시는 일본에 비해서는 선방했다. 이날 상하이종합지수는 장중 한때 2.54%까지 떨어지다 오후에 반등, 전날보다 0.88% 하락한 2504.82에 마감했다.

일본 증시 폭락의 도화선이 된 것은 전날 미국 증시의 급락이었다. 통상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새해에 대한 기대감, 연말 보너스 지출로 인한 소비 증가 등으로 주가가 상승해 '산타 랠리'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올해 크리스마스엔 미국 증시 사상 최악의 폭락 장세가 나타났다. 다우지수는 2.91% 떨어져 이 지수가 만들어진 133년 역사상 크리스마스이브 기준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나스닥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도 각각 2.21%, 2.71% 급락했다. 다우·나스닥·S&P 등 미국 3대 주가지수가 크리스마스이브에 1% 이상 하락한 것도 올해가 처음이다.

크리스마스의 악몽… 산타 랠리는 헛된 꿈으로 - 미국 증시가 폭락한 24일(현지 시각) 뉴욕증권거래소의 한 트레이더가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다. 이날 미 증시는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기준금리를 올린 미 연준(중앙은행)을 향해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자,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 경질설 등 루머가 확산되면서 다우존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나스닥 등 3대 지수가 2% 이상씩 동반 급락했다.

미·일 증시가 하루 시차를 두고 폭락한 것은 내년 전 세계 경기 둔화에 대한 우려와 함께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이라는 단기 악재와 미국 은행 유동성 악화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 경질설 등 루머가 겹치며 패닉 셀(공포감에 의한 투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정부가 셧다운에 들어가 어수선한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4일 트위터에서 "연준은 장타는 날리지만 퍼팅을 못해 성적이 나쁜 골퍼와 같다"며 기준금리를 인상한 연준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이에 뉴욕 금융시장에서 한때 제롬 파월 경질설이 돌며 혼란이 일었다.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이 23일과 24일 주요 은행장 및 관계 기관과 소통했다는 소식도 투자자들 사이에서 "은행 유동성에 문제가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악재가 있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공포심에 기름을 부었다.

증시 폭락은 유가에도 영향을 미쳐 24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내년 2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전 거래일 대비 배럴당 3.06달러(6.7%) 폭락한 42.53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국제 유가의 기준이 되는 브렌트유 가격도 24일 런던 거래소에서 6.22% 떨어졌다.

반면 주식이나 원자재 등 위험자산에 대비되는 안전자산은 일제히 값이 올랐다. 국제 금값은 1.1% 뛰었고, 미 10년물 국채는 0.05%포인트 하락(채권 가격 상승)했다. 안전자산으로 평가받는 일본 엔화도 강세를 보이며 달러화에 대한 엔화 환율은 4개월 만에 가장 낮은 달러당 110엔에 근접했다.

증시 폭락에 각국 당국자들은 진화에 나섰다. 아소 다로 일본 재무장관은 "미·중 무역 마찰에 대한 우려가 투매에 기름을 부었지만 투자자들이 과잉반응을 하는 것"이라며 "일본 기업들의 실적은 전혀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므누신 미 재무장관은 "컴퓨터 프로그램 매매가 주가 하락을 부추겼다"며 "시장의 반응은 완전히 부풀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므누신 장관은 파월 의장 경질설에 대해서도 트위터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은 해임을 추진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전 세계 경기가 올해를 정점으로 꺾이는 조짐이 완연해지면서 금융시장의 불안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미·중 무역 전쟁 장기화, 주요국 성장 둔화, 미국의 금리 인상 등 구조적 악재가 쌓이면서 내년 세계경제 전망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내년 전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지난 7월 3.9%에서 10월 3.7%로 낮춘 바 있다. 여기에 미국의 정치적 불안까지 겹치자 투자 심리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홍춘욱 키움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경제지표는 선방하고 있지만 2009년 3월에 바닥을 찍고 9년 이상 경기가 상승하다 보니 '곧 이게 끝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투자자들이 하고 있다"며 "공포감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24일 주가 급락으로 미국 나스닥은 3대 지수 중 처음으로 본격적인 약세장에 진입했다. 전문가들은 52주 최고가 대비 주가가 20% 이상 하락했을 때 약세장에 진입했다고 보는데, 나스닥은 24일로 고점 대비 23.6% 하락했다. 다우지수와 S&P500지수도 고점 대비 각각 18.8%, 19.8% 떨어져 약세장 진입을 눈앞에 뒀다.

미국 경제채널 CNBC 분석에 따르면 2차 대전 이후 약세장에서 완전히 회복하는 데는 평균 21.9개월이 걸렸다. 경기가 한 번 망가지면 회복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다.

반면 과도한 공포가 잦아들면 주가가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짐 폴슨 로이트홀트그룹 수석 투자전략가는 "시장의 불안감이 정점에 달하면서 증시의 바닥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며 "조만간 큰 폭의 반등이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