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건희 삼성 회장의 딸인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이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전신은 삼성그룹의 모태인 제일모직이다. 이 전 사장은 4년 전 경영기획담당 사장으로 취임해 3년 전부터 패션부문 단독 사장을 맡아왔다. 취임 후 "2020년까지 매출 10조원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한 이 사장은 직접 사내방송에 출연하며 직원들을 독려하는 등 의욕을 불태웠다.
이 사장의 퇴진 원인 중 하나는 실적 부진이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매출은 정체돼 있고, 영업이익도 자주 적자가 났다. 올해도 영업이익 적자가 예상되는 가운데 이 사장까지 떠나자, 업계에서는 '패션부문 매각설'까지 나돌고 있다.
◇4년째 못 넘는 '매출 2조원'의 벽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국내 1위 패션 업체다. 지난해 국내 매출 1조5760억원을 기록했다. 국내 패션 매출을 중심으로 업계에서 통용되는 2위는 LF(1조3861억원), 3위는 한섬(1조2286억원), 4위는 코오롱FnC(1조800억원)다.
문제는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전체 매출이 4년째 정체 상태라는 점이다. 2015년 1조7382억원, 2016년 1조8430억원, 지난해 1조7495억원 등 1조7000억~8000억원대에 머물고 있다. 2015년과 2016년에는 89억원, 452억원씩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올해 1~9월 영업손실도 125억원이다. 2017년에는 326억원의 영업이익 흑자를 봤는데, 이는 엠비오·빈폴키즈 등 부실 브랜드를 정리한 덕분이었다. 삼성물산 내에서 패션부문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도 2015년 13%에서 지난해 5.97%로 줄었다. 상사부문(42.9%), 건설부문(40.9%)에 한참 뒤처진다.
◇힘 못쓴 주력 브랜드 에잇세컨즈
실적 부진 원인으로는 패스트패션(SPA) 브랜드인 에잇세컨즈가 실패한 영향이 크다. 에잇세컨즈는 일본 유니클로의 대항마로 이 전 사장이 기획 단계부터 직접 챙긴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주력 브랜드다. 그러나 에잇세컨즈의 작년 매출은 1860억원으로, 경쟁 관계인 국산 브랜드 스파오(3200억원), 탑텐(2000억원)보다 적다. 일본 패션업체 패스트리테일링의 유니클로가 한국에서 1조3732억원, 전 세계에서 17조2700억원의 매출을 올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에잇세컨즈는 2016년 중국 상하이에 초대형 매장을 열고 중국 시장 공략에 나섰지만, 2년 만에 철수하기도 했다. 현재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34개의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SPA, 아웃도어, 골프 의류 등으로 변해온 패션 산업의 흐름에 적응하는 속도가 삼성답지 않게 늦었다"고 말했다.
◇곧 조직 개편…매각설도 솔솔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곧 조직 개편안을 발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패션부문의 최고위 임원은 박철규 부사장(상품총괄)이다. 빈폴·에잇세컨즈·여성복·남성복 등으로 구성된 조직을 합치거나 축소하는 내용이 포함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업계에서는 이 전 사장의 퇴진과 함께 삼성물산 패션부문이 구조조정이나 매각 절차를 밟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재용 부회장은 평소 문어발식 경영에 대한 회의(懷疑)를 주변에 표현해왔고, 2014~2015년에는 비주력이었던 화학·방산 계열사 매각을 주도했다.
한 대기업 패션업체 관계자는 "실적이 안 나더라도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이 오너 경영의 장점인데, 이제 돈 안 되는 패션부문 사업에 추진력이 붙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패션부문 매각은 삼성그룹 전체의 지배 구조가 정리되고 나서 논의돼야 할 사항이라 아직은 섣부른 단계의 얘기"라는 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