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의 김봉기 대표는 지분 5% 미만을 가진 기관투자자 자격으로 지난 27일 KISCO홀딩스(001940)에 공개 주주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주가가 기업 가치에 비해 현저하게 낮으니 배당을 늘리거나 자사주를 소각해 달라는 요구가 담겨있었다. 자회사의 불법담합 행위로 벌금을 부과받아 회사에 손실을 끼친 점도 지적했다.
김 대표는 "3분기 말 기준으로 주식 1주당 보유순현금은 3만300원 꼴인데 주가는 1만3200원 정도라 저평가 돼 있다"며 "이에 대한 주주환원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막대한 벌금으로 주주가치가 훼손됐다. 불법행위와 관련된 사람들의 책임추궁은 어떻게 했고 향후 재발방지책은 어떤지도 확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국내 투자시장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란 저평가된 회사의 적은 지분을 가지고 주주권익 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방식으로 수익을 얻는 펀드다. 시세 차익을 얻는 데 집중하고 주주권 행사에 소극적이었던 관행에서 벗어나 투명성 제고나 부실한 의사 결정 추궁에 나선다.
◇ "이러면 안됩니다"…소수 주주, 기업에 잇달아 서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지난 13일 현대차그룹에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요구했다. 현대자동차에만 8~10조원 가량의 초과자본이 있는 만큼 배당에 나서 주주권익을 보호해달라는 요구였다. 현대차 주가는 3분기 실적을 발표한 이후 10년 전 수준으로 뒷걸음질 친 상태다.
현대홈쇼핑(057050)은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으로부터 서한을 받았다. 한화L&C의 매입가가 과도하게 책정됐고, 보유 현금으로 과다하게 책정된 기업을 인수하는 것보다는 주주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맞다는 주장이 담긴 편지였다.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은 편지에서 "현대홈쇼핑이 고려하는 인수가격 3000억원은 한화L&C 자기자본의 2배가 넘는 수준"이라며 "합리적인 가격으로 인수하거나, 아니면 보유한 현금성 자산으로 자사주를 대규모 매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화장품 '미샤'를 가진 에이블씨엔씨(078520)는 지난해 실시한 유상증자를 둘러싸고 투자자였던 머스트자산운용으로부터 내용증명을 받았다. 머스트자산운용의 김두용 대표는 "회사가 대규모 시설 투자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내에 현금을 이미 1100억원 넘게 보유하고 있어 유상증자는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라 유상증자 필요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 상장사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주주가 구체적인 제안을 담은 서한을 보내오자 상장사들의 고민은 늘고 있다. 상법에 따르면 전체 발행 주식의 3%를 6개월간 보유한 투자자라면 임시주주총회를 요구할 수 있다. 또 발행 주식의 1.5%를 6개월간 보유하면 감사인 선임 청구권을 가진다. 발행 주식의 0.1%를 6개월간 보유할 경우엔 회사 서류·장부에 대한 열람 청구권 등을 가진다.
미국 등에서는 2000년대 이후부터 행동주의 펀드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20여년간의 경험이 쌓인 셈이다. 전 세계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운용 자산은 2003년 118억달러에서 2015년 1300억달러로 연평균 23.7% 증가했다.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 수도 급격히 늘었다. 미래에셋대우에 따르면 전세계 행동주의 펀드 수는 2013년에 275개였으나 올해는 524개로 증가했다.
국내에서는 라자드자산운용의 '장하성펀드'가 행동주의 펀드의 시초로 꼽히고 라임자산운용의 라임-서스틴 데모크라시,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의 행동매주식펀드, KB자산운용의 KB주주가치포커스펀드, 최근 한진칼의 지분을 매입한 KCGI(Korea Corporate Governance Improvement) 등이 행동주의 펀드로 분류된다. 플랫폼파트너스자산운용, 머스트자산운용 등도 주주권 행사에 적극적인 곳이다.
주주서한을 받아든 상장사들의 대체로 미온적이다. 한 코스닥 상장사 관계자는 "대주주(오너)에 주주 제안을 보고하면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괴롭히지 좀 말라'거나 '고작 몇 주 들고선 주주랍시고 그런다'는 반응을 보여 실무진 선에서 설득에 나서기 어렵다"고 말했다.
◇ "기업이 잘하면 행동주의 펀드는 힘을 못 쓰는 구조"
상장사들은 행동주의 펀드가 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려고 한다며 큰 불안감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시장 관계자들은 '비정상화의 정상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행동주의 펀드와 상장사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긴다고 말한다. 자본이 부족해 주주의 자금으로 기업 활동에 나선 것이라면 주주 권리를 그만큼 보장해줘야 하는데, 그간은 지나치게 주주 권리가 무시당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소수주주권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어도 이를 행사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과거 형제간 경영권 분쟁을 벌인 대기업 관계자는 "20% 넘는 지분율을 가지고 있어도 이사회를 장악하지 못하면 회사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며 "이사회를 장악하려면 과반 지분을 가지고 있어야 실제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행동주의 펀드는 적은 지분을 가지고, 다른 주주들의 지지를 받아 의견을 관철해 나가는 구조다.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 사례를 살펴보면 행동주의 펀드들은 주로 5~7%의 지분을 보유한 뒤 배당확대 등을 주장하고 나섰다. 2013년에 일본 소니에게 엔터테인먼트사업 부문 분사를 요청한 서드포인트는 지분 7%를 가지고 주주제안을 넣었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알코아의 지분 6%를 가지고 분사와 대표이사 사임을 요구했다. 모두 다른 주주들의 지지가 있었다. 김우찬 고려대학교 교수는 "다른 주주들의 동조가 없으면 행동주의 펀드가 기업에 위력을 과시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한진칼(180640)의 지분을 9%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한 KCGI가 공략대상을 잘 선정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이 때문이다. 송치호 이베스트증권 연구원은 "한진칼은 다른 주주들의 지지를 쉽게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행동주의 투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사회적 지렛대(Social Lever)가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기업 사례인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최근 몇년새 한진그룹은 조양호 회장과 그 일가의 문제로 구설수에 많이 올랐다. 지난 7월에는 조현민 전 부사장의 등기이사 문제로 진에어 면허가 취소될 뻔 했고, 한진그룹 오너 일가에 대한 수사기관의 조사는 경찰과 검찰, 관세청, 법무부, 국토교통부,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교육부,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농림축산검역본부 등 11곳에서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