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6천명 작은 공국에 괴테, 실러 등 천재들 끌어 모아
아우구스트 대공, '천재들의 재능' 살리려 전폭 후원
'Less is More', 바우하우스 운동을 일으킨 건축가 미스 반데어 로에의 유명한 말이다. 불필요한 허식을 제거해서, '적으면 적을수록 풍요롭다'는 역설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현대의 미니멀리즘 운동과 맥을 함께한다.
여행도 비슷하여 반드시 규모가 크고 웅장해야 감동이 오는 시대는 지났다. 작은 곳이 오히려 더 집중력을 발휘해 디테일의 관찰하기에 쉽고 나만의 방식으로 가치를 발견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중부 독일의 바이마르가 바로 그런 곳이다.
바이마르는 인구 6만 5천명에 불과하며 시골 분위기가 물씬한 작은 도시다. 분단 기간 동안에는 동독의 영토여서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통일 이후 가장 각광받는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위대한 문화와 독일정신이 탄생하였다. 니체와 쇼펜하우어, 헤겔, 피히테 같은 저명한 사상가, 바하와 프란츠 리스트 같은 위대한 작곡가, 루카스 크라나흐와 바실리 칸딘스키 그리고 파울 클레 같은 예술가, 건축가 헨리 반 데 벨데와 그의 제자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이 도시와 인연을 맺었다.
공교롭게도 발터 그로피우스는 미스 반데어 로에와 함께 바우하우스 운동을 이끈 주역이다. 때문에 이곳에는 바우하우스 박물관이 있다. 게다가 바이마르 헌법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주의 별만큼 많은 인물들이 바이마르를 빛냈지만 그 가운데 최고의 별은 괴테다. 1775년 11월 7일 괴테가 바이마르에 도착했을 때, 인구라고 해봐야 고작 6천명에 불과했다. 당시 괴테의 나이 26살, 그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럽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되었다. 게다가 그는 법률을 전공한 변호사였다.
그토록 유명하며 전도유망한 괴테는 왜 보잘것없는 중부 독일의 변방도시 바이마르로 온 것일까? 이제 18살 성인이 되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의 군주로 갓 취임한 칼 아우구스트의 초청 때문이었다.
당시 독일은 중앙집권 국가였던 이웃 프랑스와는 달리 국토가 수십 개 혹은 때로는 백여 개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나라들로 쪼개져 있었다. 바이마르는 이웃한 영토를 합한다고 해도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던 독일 전체 가운데 가장 작은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유럽 각국의 젊은 왕자와 귀족들 사이에서는 소위 '그랜드투어'라는 교양여행이 유행하여 그 여행의 길목에서 유능한 인물을 찾아내 인재로 등용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었다.
칼 아우구스트는 파리로 여행가던 도중 프랑크푸르트에서 괴테를 만난 뒤, 그의 정신세계에 푹 빠졌다. 군주로 취임 이후 최초의 서명한 조치가 바로 괴테의 초빙이었다. 젊은 군주는 자기 나라를 최고의 문화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괴테와 아우구스트 대공의 만남. 그것은 괴테 개인으로서는 물론 인생 최대의 전환점이었지만, 인류의 문화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빅뱅의 순간이기도 하였다. 10대와 20대 애송이들의 만남이 세계의 역사교과서를 다시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주 아우구스트는 사나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매력이 있었다. 괴테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두 가지- 담배와 반려견을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괴테는 평생 아우구스트 공작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괴테는 스물 여섯살에 처음 바이마르에 발을 들여놓은 뒤 무려 56년의 긴 세월을 바이마르와 함께 하였다. 83세로 숨을 거둔 곳도 바이마르였다.
여기에는 칼 아우구스트의 어머니인 안나 아말리아의 영향도 컸다. 그녀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어린 두 아들을 키우면서 대신 섭정을 하는 동안 '뮤즈의 궁전'(Musenhof)으로 키우고자 당대 최고의 지성인 비일란트를 가정교사로 영입하였다.
누구보다 꿈의 폐활량이 컸던 여장부였다. 독일과 유럽의 일류 문화인사 초빙의 중요성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들에게 강조하였다. 그녀가 세운 '안나 아말리아 도서관'은 아름다운 실내 양식으로 유명하며 바이마르의 문화융성을 상징하는 곳 가운데 하나다.
괴테가 처음부터 바이마르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변호사 자격증은 있었지만 20대 중반의 나이에 불과한 젊은 문학청년을 바이마르 공국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추밀원' 위원으로 괴테를 발탁하자 즉각 핵심 관료들이 반기를 들었다.
관료세력의 대표였던 프리드리히 폰 프뤼치는 국가의 요직에 괴테를 임명하는 것에 항의하며 긴 상소문을 올리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젊은 군주는 이렇게 화답한다.
"천재를 자신의 특출한 재능을 마음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곳에 내버려 두는 것은 바로 그 재능을 썩히는 일이오."
괴테는 젊은 군주에게 많은 빚을 졌다. 10년 동안의 핵심 요직에 일하다 번아웃 되어 이탈리아 여행을 감행했을 때 무려 1년 9개월에 이르는 기간을 유급휴가로 인정해줬고, 더 나아가 괴테의 급료를 1600탈러에서 1800탈러로 인상해주었다.
바이마르로 돌아온 후 공직에서 벗어나 문학활동과 예술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준 이도 그였다. 당대 최고의 작가였지만 글을 써서 살기란 그때도 무척 힘들었다. 칼 아우구스트 대공은 지금 박물관이 된 괴테의 집을 사주는 등 언제나 기꺼이 괴테의 후견인 역할을 자청하였다.
괴테는 군주의 후의를 다른 방식으로 갚았다. 로마여행에서 얻은 안목과 자료를 바탕으로 괴테는 바이마르를 북유럽의 로마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괴테의 명성에 힘입어 저명인사와 천재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당시 바이마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였다. 1799년, 실러는 예나 대학의 교수라는 안락한 자리와 명예를 박차고 앞길이 순탄치 않은 바이마르에 온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으로 '고전주의'라는 문학사가 새로이 쓰여졌다. 실러 역시 죽을 때까지 바이마르를 떠나지 않았다. 바이마르의 신화는 그렇게 탄생하였다. 멋진 리더십에 대한 멋진 화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