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

1997년 IMF 구제금융, 우리는 보지 않아도 영화 '국가부도의 날' 결말을 알고 있다. 하지만 IMF 사태 당시 과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국가부도의 날은 그간 영화판에서 볼 수 없었던 IMF 사태에 주목한 이야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결과보다는 과정에 주목할 만한 영화다. 영화는 기업과 기업 간, 기업과 은행 간, 국민과 국가 간 믿음이 차례로 꺾이는 것을 보여준다. IMF 사태를 겪었던 세대에게도, 그렇지 않은 세대에게도 그 후유증은 충분히 전달된다.

영화는 외환 위기 당시 비공개로 운영되었던 대책팀이 있었다는 한 줄의 기사에서 출발했다. 1997년 11월 위기를 막으려는 자와 위기에 베팅하는 자, 회사와 가족을 지키려는 평범한 시민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는 대한민국의 경제 호황을 의심치 않았던 21년 전으로 관객을 데리고 간다. 'OECD 가입', '아시아의 네마리용' 등 화려한 수식어구가 거리를 장식하는 것도 잠시, 한국은 미국의 금리인상에 허덕이기 시작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금리가 높은 미국에 돈을 투자하기 위해 신흥시장국인 한국에서 자금을 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 팀장 한시현(김혜수)은 국가 부도 위기를 가장 먼저 예견하고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해결책을 찾아나서며 권위적인 엘리트 재정국 차관(조우진)과 각을 세운다. 국가부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부 태스크포스(TF)팀은 국민들에게 경제위기를 알릴 것인가, IMF의 도움을 받을 것인가 등을 두고 사사건건 부딪힌다.

두 사람의 대립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이면, 국가경제는 이미 무너져버리고 있다. 외환보유고는 바닥이 나고 원달러 환율은 800원에서 2000원까지 치솟는다. 값싼 환율에 달러를 빌렸던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빚이 배로 늘어나자 너나 할 것 없이 파산한다. 100대 기업의 이름에는 매일 빨간 줄이 그어지고, 종합금융회사와 제1금융권이 차례로 무너지는 모습은 처참하기만 하다.

영화 사이 사이에는 경제위기를 미리 알아채고 '달러급등'과 서민들의 '부동산'에 투자한 윤정학(유아인)과 반대로 벼랑 끝에 몰리는 서민 갑수(허준호)가 등장한다. 목숨을 끊은 사람 앞에서도 돈을 벌었다며 춤을 추는 정학의 모습을 보면 기가 찼다가, 하루아침에 부도를 맞이해 흔들리는 가장 갑수를 보면 마음이 쓰리기까지 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칭찬이 아깝지 않다. 딱딱한 경제용어가 흘러나오지만,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감에 집중하다보면 하나도 어렵지 않다. 주인공 김혜수부터 프랑스 배우 뱅상 카셀까지 베테랑 배우들은 주조연 가리지 않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국민에게 불리한 IMF 구제금융 협상에 서명하자는 경제관료들에게 "너 어느나라 사람이니" 묻는 김혜수의 카리스마는 스크린 밖 관객까지 긴장시킨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날려버린 허준호의 암담한 표정은 관객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조우진(재정국 차관역)의 연기에 분통을 터뜨리는 관객이 있을 정도니 그가 얼마나 얄미운 연기를 맛깔나게 펼쳤는지는 두말 할 것 없다.

다만 용두사미로 급작스럽게 끝나는 엔딩은 아쉬움이 남는다. 구조조정, 대량해고, 비정규직 등 IMF의 상처는 전달됐지만 당시 말레이시아 등 한국과 비슷한 위기를 겪었던 다른 나라들은 같은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응했는지, 상당수 대기업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당시 정권은 경제위기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했는지 모두 묻혀버리고 만다. 다소 싱겁게 끝났지만 아픈 근현대사 속 감독의 적나라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속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의심하라." 28일 개봉. 12세 관람가. 11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