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혁명의 최대 공신 중 하나로 꼽히는 영국의 반도체 설계기업 ARM은 모바일 기술 혁신을 주도하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지만, 반도체 업계 내에서 유명한 슬로 스타터(Slow Starter)다. 새로운 기술을 발표하기까지 준비기간이 길고, 대응도 느린 편이다. 지난 2016년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에 인수된 이후에도 이같은 회사의 본질적 특성에는 변화가 없는 듯 하다.

최근 수년동안 인텔, 엔비디아, 퀄컴 등 다른 반도체 기업들이 일찌감치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프로세서를 내놓는 동안에도 ARM은 침묵하고 있었다. 관련 연구개발(R&D)이나 인수합병(M&A)은 꾸준히 이뤄졌지만 구체적인 계획이나 발표는 없었다. 그리고 경쟁사들보다 2~3년 정도 뒤처진 올해에서야 ARM은 머신러닝 기업으로서의 비전을 내놓았다.

젬 데이비스 ARM 머신러닝 사업부 부사장.

머신러닝 같은 고성능 컴퓨팅은 ARM의 '전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영역이다. ARM의 강점은 모바일 기기에 특화한 저전력 프로세서를 설계하는 일이다. PC보다는 성능이 떨어지지만 제한된 전력 시스템 내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발휘하는 ARM의 프로세서 설계는 스마트폰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삼성전자, 퀄컴, 애플 등 모바일용 프로세서를 설계하는 대부분의 회사들이 ARM의 지식재산권(IP)을 사용한다.

젬 데이비스(Jem Davies⋅사진) ARM 머신러닝 총괄 부사장은 14일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 코엑스에서 진행된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머신러닝은 평생 한번 있을 법한 컴퓨팅 분야의 대변혁"이라며 "ARM으로서도 이같은 변화의 흐름에 동참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스마트폰뿐 아니라 스피커, 가전 등 모든 영역에서 머신러닝이 활용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ARM이 머신러닝에 접근하는 방식은 기존의 인텔, 엔비디아 등 이미 AI 분야를 선점하기 시작한 기업들과는 다소 다르다. 이 기업들이 거대한 데이터센터 내에 들어가는 고성능컴퓨팅(HPC)용 칩을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다면, ARM은 소비자들이 직접 사용하는 디바이스 내에서 머신러닝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손 위의 인공지능'을 표방한다. 저전력 칩 설계 분야에서 자사의 강점을 십분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올해 발표한 '프로젝트 트릴리움(Project Trillium)'이 그 시작이다. 프로젝트 트릴리움은 ARM의 머신러닝 프로세서와, 2세대 객체탐지프로세서(ODP), 소프트웨어 등을 포괄하는 브랜드다. 이르면 내년부터 전 세계 반도체 회사들이 이 기술을 활용해 스마트폰, 웨어러블PC 등 다양한 분야에 탑재될 칩을 생산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젬 데이비스 부사장과의 일문일답.

―ARM은 IT 기업치고는 보수적인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머신러닝과 같은 신기술 분야에 대한 대응이 느리다는 얘기다.

"ARM은 파트너 회사들의 신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반도체 기업들은 고객사에게 '하늘의 별을 따주겠다'는 식으로 접근한다. 물론 ARM도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 칩 설계를 몇 시간 만에 끝내서 준다면 마다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ARM의 방식이 아니다. 우리는 잠시 멈추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전통이 있다. 반도체 업계에는 제대로 분석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아무런 솔루션을 던지고, 결국에는 그것이 무엇에 대한 솔루션이었는지도 잊는 사례를 많이 봤다."

ARM 프로세서 이미지.

―저전력 프로세서 설계가 강점인 ARM은 왜 머신러닝 사업에 뛰어드나.

"말한대로 ARM은 비디오 프로세서, ISP, GPU 등 저전력 프로세서로 다양한 워크로드를 소화할 수 있는 칩을 제공하고 있다. 머신러닝은 논리적으로 그 다음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머신러닝은 아마 평생 한번 있을 법한 컴퓨팅 분야의 변혁이다. 영향력은 너무 광범위하다. ARM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ARM의 많은 파트너 회사들도 머신러닝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ARM의 사명은 결국 컴퓨팅이 있는 곳엔 모든 곳에서 파트너에 힘을 실어준다는 것이다. 컴퓨팅이 변화하면서 ARM도 변화해야 했다."

―현재 머신러닝을 포함한 고성능 컴퓨팅 분야는 인텔이나 엔비디아 등 다른 기업에 의해 생태계가 구성되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ARM이 어떤 경쟁력을 가질 수 있나.

"우리가 고성능 컴퓨팅 분야에서 제공할 수 있는 장점은 ARM이 제공하는 대부분의 가치와 일맥상통한다. 알다시피 우리는 직접 칩을 판매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단 하나의 길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트너들이 ARM의 디자인을 활용해 다양한 솔루션을 개발하게 지원하는 것이 우리의 강점이다. 인텔, 엔비디아와 같은 기업과 달리 우리는 우리가 답을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올해 발표한 프로젝트 트릴리움의 경우 ARM은 고객사들에게 머신러닝을 구동할 수 있는 다양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 구글, 엔비디아 등 다른 기업들이 구성해놓은 컴퓨팅 시스템에 ARM의 칩 디자인이 잘 녹아들 수 있게끔 지원한다. ARM은 고객사들은 가장 최적의 솔루션을 선택하면 된다."

―기존에는 삼성이나 애플, 퀄컴이 ARM의 디자인을 구매해 용도에 맞게 설계를 변경해 칩을 생산하거나 아니면 설계 그대로 생산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머신러닝 이후에는 라이선스 방식이 달라질 수 있나.

"과거와 그렇게 크게 달라질 거 같진 않다. 예를 들어 퀄컴의 경우 자체 GPU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ARM이 제공하는 말리(Mali)를 사용하지 않는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경우 ARM의 표준 CPU 라이선스를 사용하지만 GPU는 다른 기업의 디자인을 쓴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건 머신러닝 분야에서도 유사할 것으로 본다. 파트너 회사들이 ARM이 제공한 디자인 위에 자신들의 기술을 접목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프로젝트 트릴리움의 경우 모바일 프로세서에 구조적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그렇다. 우선 아키텍처 설계를 잡아가는 과정부터도 완전히 다르다. ARM은 머신러닝이라는 컴퓨팅 기술의 본질을 십분 이해하고 출발했다. 코드를 분석하고 파악해 CPU 내에서 가장 데이터 연산이 효율적인 방식을 고민하고 아키텍처에 변화를 줬다. 다른 반도체 기업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다른 기업들은 기존 아키텍처를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

데이터 전송과 관련 설계도 최적화했다. 불필요한 데이터 로딩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전체적인 데이터 흐름을 최소화했다. 이에 따라 머신러닝 프로세서가 전력 효율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또 프로그래머블 레이어 엔진 기술을 도입해 각 칩이 상황에 따라 새로운 프로그램을 얹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기술이 소비자들에게 의미하는 가치는 무엇이고 언제부터 체감할 수 있을까.

"모든 컴퓨팅 분야에서 향상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게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이다.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모든 디바이스에서 머신러닝 디자인이 구현된다. 또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 직접 설계에 큰 비용을 투자하지 않고도 충분히 좋은 머신러닝 프로세서 기술을 구현할 수 있다. 다만 언제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회사별로 작업 속도가 다르고 솔루션 구현의 수준도 다르다. 중국 파트너사의 경우 IP를 가져가서 8개월만에 제품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빠르면 내년부터 시작될 것으로 본다. 다만 아직 머신러닝 프로세서는 매우 초기단계라는 것이다. ARM은 10년 이상을 내다보는 장기적 계획으로 이 분야에 접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