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임금 및 단체협상(임단협)을 끝낸 지 불과 반년 만에 한국GM 노조가 파업 카드를 꺼내들었다.

16일 한국GM 노조는 78.2% 이르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파업을 가결했다. 중앙노동위에서 조정 중지 결정을 내리면 노조는 쟁의권을 얻게 된다. 업계에서는 중노위 결과가 이달 22일쯤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노사가 다시 기싸움을 벌이게 된 이유는 연구개발(R&D) 부문 신설법인 설립 때문이다. 노조는 법인 분리에 대해 "철수 수순"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반면 사측은 "철수는 오해"라고 반박한다.

R&D법인 분리에 반대하는 한국GM노조가 파업 찬반투표를 진행했다.

연구개발 법인 설립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국민 혈세를 받아 정상화된지 불과 6개월 만에 노사가 다시 죽기 살기로 싸우는 걸까. 노조와 사측, 산업은행 등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을 살펴봤다.

◇ 연구개발 법인 분리? 이미 따로 노는 생산과 연구조직

한국GM은 지난 4일 이사회를 열고 인천 부평 본사의 디자인센터와 기술연구소, 파워트레인 부서 등을 통합해 별도의 R&D 법인을 만들어 분리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오는 19일에는 이 안건을 최종 확정할 주주총회가 개최된다.

한국GM은 연구개발 법인 분리가 GM 그룹 내에서 한국 디자인센터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조치라고 설명한다.

직원 입장에서보면 생산과 연구개발 법인을 분리해도 당장 크게 변하는 일은 없다. 어차피 생산과 연구조직은 하는 일도 다른데다, 업무 연관성도 점차 분리되던 추세였다.

실제 부평공장이나 예전 군산공장에서는 한국에서 개발된 차만 만들지 않는다. 부평공장에서 생산하는 말리부나, 군산공장에서 만들었던 크루즈는 해외에서 개발된 차를 들여와 생산했다. 반대로 한국GM에서 초기부터 개발에 참여했던 볼트EV는 미국에서만 생산된다.

부평공장에서 생산되는 말리부.

그러나 노조는 연구개발 조직이 분리되는 것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사측이 법인 분리 후 한국에서 R&D 부문만 존속시키고 생산 부문은 결국 정리할 것이란 얘기다. 노조 관계자는 "법인이 분리된다면 생산 법인은 단순 하청기지로 전락하고 향후 주문이 끊기면 곧장 공장 폐쇄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GM, 10년 뒤 철수 가능성 커져

노조가 우려하는 것처럼 연구개발 법인이 분리되더라도 당장 공장 폐쇄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 한국GM은 지난 5월 한국에 최소 10년간 머물기로 산업은행과 합의했고, 36억달러의 신규 투자 자금을 받기로 한 상태다. 따라서 10년간 공장 운영이 계속된다.

한국GM과 정치권, 협력사 대표가 지난 4월 23일 임단협 잠정 합의 후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카허 카젬 한국GM 사장, 배리 엥글 GM 글로벌 사업부문 사장,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 문승 한국GM 비대위 대표

산업은행도 한국GM이 당장 국내에서 철수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GM이 연구개발 법인을 분리할 경우 10년 합의 기간 이후에 생산 공장을 폐쇄할 가능성이 커진 것은 인정하는 분위기다. 이 때문에 산은은 지난달 한국GM의 법인 분리 안건을 처리할 주총 개최를 저지하기 위해 인천지방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신설법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좀 더 시간을 두고 파악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일방적으로 법인을 설립하려는 한국GM의 19일 주총을 막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은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비토권을 행사할 계획이지만 법적으로 신설법인 설립을 막기는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 "중형SUV 개발 등 본사 협업 위해서는 분리 필수"

한국GM은 GM 본사의 글로벌 베스트셀링 모델인 중형급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제품의 차세대 디자인 및 차량개발 업무를 가져올 계획이다. 현재 국내에 판매되고 있는 이쿼녹스 후속 모델이다. 이를 위해선 연구개발 법인분리가 필요하다고 한국GM은 주장한다.

앞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생산·판매되는 제품 개발을 주도하려면 GM 글로벌 임원들이 더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본사와 유기적으로 협업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 법인을 별도로 둬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GM 군산공장.

회사는 생산법인과 연구개발법인 분리는 글로벌GM의 전략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유럽 오펠이나 중국 상하이GM도 생산공장과 연구개발 법인을 별도로 운영했다.

물론 사측이 한국시장 철수와는 관련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법인을 분리하면 부실한 사업을 정리하기 수월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경쟁력 없어진 생산법인은 언제든 정리가 가능하고, 상황에 따라 매각하기도 편하다.

완성차업계 관계자는 "GM 입장에서 추후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군산공장처럼 생산법인을 언제든 문 닫거나 혹은 팔수도 있다"며 "생산 법인이 정부 자금을 받아 독자 생존을 시도하더라도 자동차회사가 차량 연구개발 능력이 없으면 홀로서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조합원 반발 등 노조도 사면초가

한국GM 직원들은 지난 4월 단체교섭 여파로 복리후생비가 축소돼 지난달부터 임금이 약 10%가량 감소했다. 이 때문에 조합원들은 노조에 대한 불만이 크다. 여기에 무급휴직자 생계비 지원도 문제다. 무급휴직자 생계비의 경우 6개월은 정부가 지원하고, 30개월은 회사와 노조가 반반씩 1인당 225만원을 지원하기로 임단협 과정에서 합의했다.

인천 부평구에 있는 한국GM의 자동차 생산 라인에서 직원들이 작업을 하는 모습.

그러나 노조 지원비는 조합원들이 매달 3만~4만원을 갹출해야 하는 만큼 조합원들의 반발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조합원들이 갹출하지 않으면, 노조 운영자금에서 무급휴직자 생계비를 조달해야 한다.

연구개발 법인이 신설되면 조합원이 대폭 줄어드는 것도 노조에는 부담이다. 이미 군산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한국GM 노조의 경우 조합원이 2000여명가량 감소했다. 여기에 연구개발법인까지 신설되면 기존 노조의 힘은 급격하게 쪼그라들게 된다.

연구개발 법인으로 가는 직원들도 편한 것은 아니다. 노조는 신설법인의 경우 단체협약이 승계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 구조조정의 위험에 노출된다. 현행법상 신설분할의 경우 단협 승계의무가 없기 때문에 언제든 회사 측이 원할 경우 구조조정을 할 수 있다.

완성차업계 한 관계자는 "복리후생 축소로 임금이 줄었고, 최근에는 조합원비를 아끼려고 조합을 탈퇴하는 직원들도 늘어나고 있다"며 "노조 입장에서도 현재 상황이 상당히 곤혹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