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이시자카 노리코 이시자카산업 사장

"도코로자와에서 생산된 채소에서 다이옥신이 검출되다."

1999년 2월, 산업폐기물 처리업체가 밀집된 일본 도코로자와는 다이옥신이 기준치 이상 검출됐다는 텔레비전 보도 후 아수라장이 됐다. 산업폐기물 처리업체인 이시자카산업은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의 공격을 받고 거래 업체로부터 외면당했다. 회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자 서른 살의 이시자카 노리코(石坂典子)는 아버지 뒤를 이어 2대 사장에 취임했다.

그로부터 12년 후, 이시자카산업은 ‘친환경 기업’으로 변모했다. 도쿄돔 4배 넓이의 회사 부지 ‘숲 공원’에는 천연기념물 반딧불이와 토종 꿀벌이 날아다니고, 회사가 주관하는 숲속 여름 축제에는 700명 넘는 주민들이 참석해 즐겁게 지낸다. 일본 굴지 기업들이 이 회사 비결을 배우러 찾아오고 아이들이 줄지어 공장 견학을 온다. 이 회사를 찾는 방문객 숫자만 연간 3만명이다. 지역의 미운 오리 새끼였던 회사가 10여 년 만에 자랑거리가 된 비결은 책으로도 출간됐다. 국내에도 ‘반딧불이 CEO’라는 제목의 번역본이 나왔다.

이시자카 노리코 2002년 이시자카 산업 2대 사장 취임, 2013년 일본 경제산업성 주최 ‘오모테나시 경영기업’ 선정, 2014년 ‘문부과학대신상’ 수상, 2016년 ‘화이트기업 대상’ 수상

9월 19일 일본의 이시자카산업을 찾아 노리코 사장을 인터뷰했다. 도쿄의 부도심 이케부쿠로역에서 출발하는 도부도조(東武東上)선 전철을 타고 30분쯤 달려 후지미노역에 내렸다. 역에서 택시로 20분쯤 거리에 이시자카산업이 있었다. 노리코 사장은 옅은 카키색의 근무복을 입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一 사장직을 물려받을 때 상황이 최악이었다.

"원래 회사를 이을 생각은 없었다. 디자인 일을 하고 싶어서 미국에 잠시 유학했다. 그때 알게 된 네일아트 비즈니스에 흥미를 느꼈고, 일본에 돌아와 네일 살롱을 열기 위한 자금을 모으려고 아버지 일을 도왔다. 10년간 사무 일을 했다. 두 번째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였던 1999년, 일본에서 한창 다이옥신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이시자카산업엔 큰 소각로가 있었다. 다이옥신을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소각로였지만 지역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3000여명이 ‘나가라’라는 반대 서명을 했다. 회사가 존속할 수 있을지 일대 위기였다."

一 그래서 어떻게 했나.

"회사를 이어가고 싶어졌다. 아버지에게 ‘사장을 맡게 해 주세요’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여자에게 경영을 맡길 수 없다’며 처음엔 거절했다. 우리 집은 3남매다. 나(장녀)·장남·차녀순인데, 아버지는 ‘기회는 줘 보자’라는 생각으로 내게 대표권 없는 사장을 시켰다. 그게 16년 전 일이다."

노리코 사장이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소각장 사업 철수였다. 당시 회사 매출의 70%가 산업 쓰레기를 태우는 소각 사업에서 나왔지만, 현재 이미지로는 사업을 더 벌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리사이클 분야에 집중했다. 새로운 기술과 설비를 갖추는 데만 400억원이 투자됐다. 업계 사람들 모두 "철없는 딸이 아버지 돈을 퍼 쓴다"며 혀를 찼지만, 결국 놀라운 성공으로 이어졌다. 불에 타지 않는 불연성 폐기물로 승부를 본 이시자카 산업은 지난해 513억원의 매출을 거뒀다. 산업 폐기물의 재활용 비율도 95%에 달한다.

一 사장이 된 뒤 무엇을 했나.

"지역민에게 사랑받는 회사로 변모시키고 싶었다. 우선 겉모습을 바꿨다. 폐기물이 매일 (트럭으로) 몇 백 대나 들어오니까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민폐 끼치는 회사’로 보는 것도 당연했다. 큰 건물을 지어 안에서 작업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다. 모두가 반대했으니까. 그래도 몇 번이고 시청에 찾아가 ‘살아남고 싶다’ ‘건물 짓는 것은 기업을 확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환경 투자다’라고 설득했다. 그때 마침 나와 같은 나이의, 지식·경험도 아직 적은 시청 담당자가 많이 응원해주고 여러 조언을 해줬다. 그 덕분에 건축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개혁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반년 사이에 직원 40%가 떠났다. 노리코 사장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회사에 불이익을 주고,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요소는 끈질기게 바꿔나갔다.

一 그 다음은?

"회사가 겉보기에 좋아졌다고 살아남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일하는 자세를 바꿨다. 일본에는 400만개 회사가 있는데, 100년 이상 이어지는 회사는 그중 0.1% 정도다. 가족이 대를 물려 경영하는 회사라고 하면 4대(代)까지다. ‘4대까지 이어지는 회사란 어떤 회사일까?’를 생각해봤다.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물을 짓고 사원 교육을 시작했다. 지역민에게 이해를 얻기 위해 ‘공장 견학’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내부적으로 반대가 많았다. ‘폐기물 재활용 공장에 누가 오겠어?’라고. 쓸데 없는 투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나는 우리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모습을 바깥에 보여주고 싶었다. ‘이렇게 힘든 일인데, 여러분 대신 우리가 쓰레기 분리하는 일을 매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이다."

이시자카산업이 직접 조성한 숲 공원

一 어떤 것이 가장 어려웠나.

"사원 교육이 제일 어려웠다. 왜냐면 그들은 수동적으로 매일의 ‘작업’을 반복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던 일이 보이게 됨으로써, 현장 분위기가 더 밝아졌다. 그들이 프라이드를 갖게 되면서 작업이 가치 있는 ‘일’이 됐고 성과도 더 높아졌다. 물건 만드는 회사는 아니지만 회사 이름이 브랜드화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기업의 부가가치로 바뀌었다. 외부 평가가 올라가고 매스컴으로부터 주목받게 되면서 많은 분이 공장 견학을 오게 됐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우리 회사에 들어오게 됐다. 과거엔 평균 연령이 55세였지만, 현재는 20·30대가 40% 정도 된다."

一 ‘이코노미조선 글로벌 콘퍼런스’ 강연에서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

"‘아무리 해도 이건 무리야’라는 사고방식, 그런 것은 얼마든지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관점을 바꾸면 일도 바뀐다. 세상에는 ‘원래부터 있던 것’들이 있는데, 이런 것을 바꾸면 많은 기회가 생긴다. 폐기물 재활용 비즈니스도 기술력이 중요한 미래형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알리고 싶다."

一 이념은 훌륭하지만 구체적인 실행에서 실패하는 경영자가 많은데.

"일의 구조가 사원에게 맞지 않는다면 실패해버리고 만다. 사원의 레벨에 맞게 일의 짜임새를 ‘변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국제규격 ‘ISO’를 처음 땄을 때, ISO의 설명을 만화로 만들었다. 직원들이 활자 읽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사장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요구되는 프로세스라는 것을 사원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의 방법론도 중요하다."

一 어떻게 방법론까지 생각하게 됐을까.

"아버지는 기술에 정통하고 확실한 신념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부족한 것이 ‘말’이었다. 직원이나 지역 사회에 ‘전하는’ 것과 전하는 ‘방법’이 부족했다. 잘 모르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모르면 두려워한다. 나는 알게 한 뒤에 판단하게 하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부족했던 ‘말’을 그저 바깥으로 ‘보이게 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