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현지 시각) e스포츠게임 '도타2(DOTA2)' 세계대회가 열린 캐나다 밴쿠버 로저스 아레나.

2만명의 관중이 환호하는 가운데 브라질 e스포츠 프로 게임팀 '페인 게이밍' 5명이 경기장 부스에 입장했다.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됐지만 상대팀 부스는 텅 비어 있었다. 이들의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미국의 비영리 인공지능(AI) 연구소 오픈AI가 개발한 '오픈AI 5(FIVE)', 다시 말해 AI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접전 끝에 경기는 인간팀의 승리로 끝났지만 전 세계는 오픈AI 5의 능력에 놀라고 있다. 내년 대회 땐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협업과 희생까지 배운 AI

AI는 1997년 체스, 2011년 퀴즈쇼, 2016년 바둑에서 인간 최고수를 넘어섰다. 테슬라 창업자인 일론 머스크가 세운 오픈AI는 지난해 다음 목표로 도타2를 지목하고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다. 도타2는 북미, 유럽, 중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게임. 5명이 팀을 이뤄 각각 캐릭터(영웅)를 선택한 뒤 전투를 벌이며 상대방의 본진을 점령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도타2를 정복하려면 체스·바둑보다 훨씬 높은 AI 성능이 필요하다. 도타2는 캐릭터 하나가 다음에 할 수 있는 동작이나 기술의 조합이 1000가지에 이른다. 평균 45분간의 게임에서 일어나는 모든 동작이 100만~150만회쯤 된다. 고려해야 할 경우의 수가 무한대에 가깝다는 것이다. 반면 체스는 한 번에 둘 수 있는 수가 35가지, 바둑은 250가지 정도다.

게임으로 경기하는 e스포츠 경기에서 인공지능(AI) 측 5개 컴퓨터에는 인간이 아무도 앉아 있지 않다. 큰 사진은 미국 AI 연구소인 오픈AI가 개발한 인기 게임 도타2용 AI 프로그램 측 선수석 장면. 작은 사진은 22일(현지 시각) 캐나다 밴쿠버 로저스 아레나에서 열린 e스포츠 게임 ‘도타2’ 세계대회 현장. 이 대회에서 오픈AI의 프로그램은 인간 최강팀과의 경기에서 접전 끝에 패배했다.

또 체스·바둑은 상대방의 수와 전체 판세를 훤히 보면서 전략을 짜지만, 도타2는 상대방이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오픈AI는 막대한 컴퓨팅 파워를 사용했다. 가상서버(클라우드)로 연결된 중앙처리장치(CPU) 12만8000개와 256개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이용해 게임의 규칙만 알려준 상태에서 AI 스스로 게임을 반복하도록 했다.

오픈AI 측은 "오픈AI 5는 하루에 사람이 180년간 해야 하는 양의 게임을 진행하면서 노하우를 터득했다"며 "인간 프로게이머의 방식은 아예 가르치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로 이날 경기에서 오픈AI 5는 기존 프로게이머들의 대결에선 선보인 적 없는 새 전략을 매 순간 구사하며 마지막까지 인간팀을 몰아붙였다.

특히 오픈AI 5는 알파고(AlphaGo) 같은 기존 AI 프로그램과 다른 새로운 특징이 있다. 일대일로 대결하는 체스나 바둑과 달리 도타2는 5명이 한 팀을 이뤄 진행한다. 이 때문에 오픈AI는 게임 정보를 주고받는 것 외에는 완전히 독립된 AI프로그램 5개로 팀을 구성해 훈련시켰다. 이를 통해 오픈AI 5는 같은 팀 AI와 함께 상대방을 공략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캐릭터를 총알받이로 활용해 다른 AI를 살리는 전략도 터득했다. 인간의 최대 장점인 협업과 희생을 흉내 내면서,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 AI를 만들 가능성을 연 것이다. 오픈AI 5의 대결을 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도 "협업과 희생을 터득한 것은 AI 역사의 거대한 이정표"라고 했다.

날씨·교통·경제 등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는 AI

e스포츠에 도전하는 것은 오픈AI뿐이 아니다. 바둑에서 이세돌 9단과 중국의 커제 9단을 꺾은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 역시 현재 스타크래프트를 배우고 있다. 이들이 e스포츠를 연구하는 것은 현실에서 활용할 수 있는 AI를 개발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날씨, 교통, 경제 등 현실에서 인간이 풀어야 하는 정보는 대부분 불완전한 정보다. 아무리 많은 위성사진과 과거 데이터를 동원해도 태풍 예보가 번번이 틀리는 것은 태풍의 진로와 세기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변수를 모으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식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실장은 "e스포츠를 통해 AI가 불완전한 정보로 전략을 짜고, 최적의 예측과 분석을 하도록 학습시킬 수 있다"며 "이 기술이 발전하면 부족한 데이터를 AI가 스스로 만들어내 모든 변수를 고려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극복해야 할 과제도 있다. 오픈AI 5는 이달 초 전직 프로게이머가 포함된 세미 프로팀과의 대결에서 압승을 거뒀지만 이번 대회에선 초·중반부와 달리 종반부 들어 인간팀에 급격히 무너졌다. 오픈AI 측은 "엄청난 경우의 수에 대한 예측과 전략 수립이 아직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학습량을 늘려 다시 도전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