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20일 전현직 간부 12명이 퇴직후 재취업 관련 문제로 기소되자 현직 직원과 퇴직자 사이의 접촉을 막는 조치를 취했다.
현직과 퇴직자는 사건 관련 사적인 만남이 전면 금지되며, 사무실 전화 등 공적인 접촉에 대해서도 감사담당관에게 곧바로 보고해야 한다. 또 공정위 현직 직원들은 앞으로 퇴직자와 기업 및 로펌 관계자들을 마주칠 수 있는 외부 교육 과정에도 참석할 수 없다. 공정위가 퇴직자, 기업 및 로펌 관계자와 현직 직원간 만남이 취업과 사건 처리 로비로 이어진다는 판단 아래 연결 고리 자체를 끊는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공무원들만의 도시인 세종에 갇혀 민간과 접촉이 막혀있는 공정위가 이번 조치로 '갈라파고스'화(化)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갈라파고스는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생물 종(種)을 발굴 할 수 있는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의 섬 이름으로, 보편적인 시장 기준을 외면하고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 경쟁력을 잃어버리는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일부 공정위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는 "잘못은 고위급이 했는데 직원들만 고생한다"며 다른 부처로 옮겨야 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 소리도 나오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공정위 '로비스트 규정' 더 강화…현직-퇴직 사적 만남 일절 금지
검찰은 지난 16일 대기업을 압박해 퇴직자들의 재취업을 도운 혐의로 공정위의 정재찬 전 위원장과 김학현·신영선 전 부위원장 등 3명을 구속 기소했으며, 노대래·김동수 전 위원장과 현직인 지철호 부위원장, 한철수 전 사무처장 등 9명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겼다. 전현직 간부 12명이 동시에 기소된 건 공정위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정부 내부에서는 그동안 공정위 현직과 퇴직자간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개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공정위 직원들이 퇴직 후 친정인 공정위를 상대로 '로비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공정위는 대기업 수사를 전담으로 하기 때문에 현직-퇴직자간 만남이 로비의 창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가 나왔다.
이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취임 이후 내부 개혁을 강하게 주장했다. 김 위원장은 올해 초부터는 '한국판 로비스트 규정'을 자체적으로 마련해 운영 중이다. 공정위 직원들은 대형 로펌 변호사, 대기업 대관 담당자, 로펌이나 대기업에 재취업한 공정위 퇴직자를 접촉하면 그 내용을 감사담당관에게 보고 해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중징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공정위는 이날 더 규제를 강화한 '로비스트 규정'을 발표했다. 이전에는 현직 직원이 사후 보고만 제대로 하면 퇴직자와의 사적 만남이 허용됐다. 그러나 앞으로는 사건과 관련해서는 현직과 퇴직자간 사적 만남이 일절 금지된다. 공정위는 이를 어긴 현직자는 중징계할 방침이며, 퇴직자는 공정위 출입 금지 등의 제재를 할 계획이다. 또 공적인 접촉(사무실 전화, 공직메일)도 과거엔 보고 대상이 아니었지만, 앞으론 반드시 보고해야 한다.
◇ 공정위 "직원들 퇴직자, 기업·로펌 관계자 참여하는 교육 과정 참석 금지"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만남도 금지된다. 공정위는 현직 직원들이 퇴직자, 기업, 로펌 등이 주최하는 외부 교육 과정에 참여하는 것도 금지했다. 예를 들어 현직 직원들은 지금까지는 서울대 경쟁법센터에 개설된 '공정거래법 연구과정', 공정경쟁연합회가 개최하는 '공정거래법 전문연구과정' 등을 수강할 수 있었다. 경쟁법과 경제정책 이슈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전문성을 쌓고, 기업과 로펌 등에 소속된 민간 전문가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게 주요 취지였다.
서울대 경쟁법센터는 경쟁법 권위자인 권오승 전 공정거래위원장이 설립을 주도했고, 이 곳의 공정거래법 연구과정은 공정거래법 전면개정 TF(태스크포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봉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주관하고 있어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공정위가 친기업 성향이라고 문제삼았던 시민 단체들은 이런 교육 프로그램을 로비 창구로 비판해왔다. 참여연대는 올해 초 공정위 현직 직원들이 대기업과 대형 로펌 등을 회원사로 둔 민간 단체가 주관하는 외부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해 현직-퇴직자-대기업간 '부적절한 3각 만남'이 이뤄지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공정위의 이번 조치는 시민단체들의 문제 제기를 수용해 투명성을 높인다는 의미는 있지만, 전문성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 기업 등과의 소통 창구를 폐쇄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공정위가 스스로 주위와 벽을 쌓는 '갈라파고스'로 고립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공정위 안팎에서는 전현직 간부가 무더기로 기소된 마당에 이번 조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 대형 로펌·대기업 관계자들 "공정위 전문성 현저히 떨어져"
대형 로펌과 대기업 간부들 사이에서는 올해 초 로비스트법이 시행된 후 공정위의 전문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 같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 정부 부처들은 세종에 내려오면서 지리적인 문제 때문에 전문성이 과거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공정위 직원들은 퇴직자, 대형 로펌, 기업들과의 교류도 끊기면서 정보를 얻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다.
실제로 올해 초 그룹 내 지배구조 개편 차원에서 인적분할된 회사를 과거 사명(社名)으로 사건처리를 했다가 전원회의를 새로 개최해 사건처리 의결을 다시 한 일도 있었다. 공정위의 주요 업무인 대기업 집단 지정 때는 이미 사망한 인물을 동일인(총수)으로 지정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한 대형 로펌 관계자는 "올해 초 공정위 로비스트법이 시행된 후 사건 처리 속도가 과거에 비해 늦고, 직원들의 정보 수준도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사건 처리를 위해 전원회의를 가면 어처구니 없는 실수가 일어나는 걸 종종 봤다"고 말했다.
다른 로펌 관계자는 "공정위가 사건 입증 능력이 떨어지니 기업에 현장 조사를 나갈 때마다 로펌에서 작성한 (사건 관련) 의견서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서 "로펌의 법률 자문 의견을 유력 증거라고 주장할 때 마다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
◇ 공정위 내부도 고민 "시장 괴리되지 않는 방안 적극 마련"
공정위도 내부적으로 고민이 많은 상태다. 채규하 공정위 사무처장은 "공정위 직원들의 외부 소통을 차단하면 결국 시장과 괴리되는 갈라파고스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을 수 있다"며 "공정위 자체 연구회를 활성화하고 시장과 소통할 수 있는 간담회를 활발하게 만드는 등 시장과 괴리되지 않는 방안도 적극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공정위가 현직-퇴직자간 만남을 원천 봉쇄하는 것 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공정위 퇴직자 재취업 문제가 심각한 건 다른 부처에 비해 고위급 자리가 적으면서 10년간 일해도 승진이 안될 정도로 인사 적체가 심하기 때문이다.
한 퇴직자는 "공정위는 1급 자리가 다른 부처에 비해 적은 상황에서 유관 업무 기관에 3년 동안 재취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고위급이 계속 자리를 지킬 수 밖에 없고, 고위급을 내보낼 산하 기관도 많지 않다"며 "그러면서 밑에 직원들은 10년 동안 승진을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등 인사 적체가 심각해 대형 로펌과 대기업에 대한 재취업 비리가 더 발생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직과 퇴직자간 만남을 단순히 차단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 기회에 공정위 조직을 어떻게 제대로 구성할 것인지 근본적인 부분을 들여다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정부 관계자는 "공정위 젊은 직원들의 다른 부처 전근 요청이 쇄도 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며 "최근 검찰 조사로 공정위 조직이 많이 불안한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