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를 아끼기 위해 누진제를 유지해야 한다면 모든 전기세에 누진제 적용을 요청합니다.”

"정부가 폭염도 국가 재난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한 상태에서 최소 폭염 기간 중 가정용 전력 누진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대구, 경산지역은 지역 특성상 매년 대프리카, 경프리카로 불리며 (온도가) 최고 기록을 경신합니다. (누진제) 폐지를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연이은 폭염 기간만이라도 누진제 적용을 해제해달라는 것입니다."

폭염이 이어지면서 전기를 많이 쓸수록 더 큰 폭으로 요금이 올라가는 현행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를 폐지하거나 일시 중단해 달라는 요구가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빗발치고 있다. 31일 기준 최근 1주일 사이 '누진제' 키워드와 관련된 청와대 국민 청원 건수만 244개다. 특히 지난 16일 '전기 누진세 폐지 좀 해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은 4만5587명이 ‘동의’를 눌렀다.

이어지는 청원에 정부도 개편 가능성을 시사했다. 박성택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산업정책관은 지난 30일 " 2016년 누진제를 개편해 부담을 완화했지만,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만약 논란이 계속된다면 근본적으로 (개편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 정책관은 "주택용에도 계시별 요금을 도입해 소비자가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대해 책임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계시별 요금제란 계절을 봄·가을, 여름, 겨울 3개로 하고 시간대를 최대부하, 중간부하, 경부하 3개로 나눠 전기요금을 차등 적용하는 것이다.

폭염이 이어진 지난 30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 태양이 작열하고 있다.

◇ "하루 10시간 에어컨 틀면 월 17만7000원 더 들어"

전기요금 누진제는 1973년 오일쇼크 이후 도입됐다. 첫 도입 때는 3단계 누진제로 최저~최고 요금의 차이가 1.6배였지만 2차 오일쇼크가 강타한 1979년에 12단계로 확대됐고 요금 차이는 무려 20배로 늘었다. 정부는 2016년 기존 6단계 11.7배수의 누진제를 현행 3단계 3배수로 개편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누진제 폐지 요구 글이 이어지는 것은 2016년 누진제 개편으로 전기요금 부담이 줄긴 했지만, 오래 에어컨을 켜두면 여전히 만만치 않은 전기료가 청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력(015760)은 누진제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자 지난 27일 누진제 개편 이전과 이후 에어컨 사용에 따른 전기요금을 비교하는 설명자료를 통해 2016년 누진제 개편으로 전기요금 부담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도시에 거주하는 4인 가구는 통상 월 350㎾의 전력을 사용하는데, 이 가구가 소비전력 1.8㎾인 스탠드형 에어컨을 하루 3시간30분 사용할 경우 월 전기요금은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을 때보다 6만3000원 늘어난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2015년 가구당 하루 평균 에어컨 사용시간을 3시간 32분으로 조사했다.

하루평균인 3시간30분보다 에어컨을 2시간 더 사용하면 월 전기요금은 3만5000원이 더 늘어 9만8000원이 늘어난다. 만일 한 달간 하루 10시간씩 에어컨을 틀면 전기요금은 17만7000원이 더 붙는다. 하루에 에어컨을 2시간만 사용하면 추가 전기요금은 약 3만6000원이다.

한전 관계자는 "누진제 개편을 하지 않았다면 에어컨 사용시간에 따른 추가 요금 부담은 3시간30분 10만8000원, 10시간 39만8000원, 2시간 4만8000원이었다"며 "에어컨을 하루 10시간 사용했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누진제 개편 이후 22만원을 절약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폭염이 이어 지고 있는 가운데 시민들이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양산을 쓰고 있는 모습

◇ 일본, 미국 등도 누진제 적용하지만 배율 낮아

한전의 설명에도 일반 시민들은 여전히 전기요금이 부담스럽다고 주장한다. 국내 전기 사용량 중 가정용 비중은 13%, 산업용은 56%, 상업용은 20%인데 가정용에만 누진제가 부과되고 있어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한 시민은 “기업들은 전기소비를 많이 하는 것에 비해 요금할인을 받고 있는데, (가정용에만 누진제를 적용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전은 “누진제는 전기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한 사용자로부터 징수한 전기요금을 상대적으로 적게 사용한 주택용 전기 사용자에게 돌려주기 위해 필요하다”며 “누진제는 해외에서도 주택용에는 보편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제도"라고 했다. 저소득층을 배려하고 전력 수요를 조절하는 차원에서 누진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6년 8월 기준으로 가정용에 전기요금 누진제를 적용하는 나라는 대만(3배), 중국(1.6배), 일본(1~1.7배), 미국(1.1~2배), 캐나다(1.2~1.5배) 정도다.

에너지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외국은 누진제를 시행하더라도 폭이 크지 않고 오히려 신재생에너지가 도입되면서 형평성 문제로 누진 배율을 줄여나가는 추세"라며 "누진제 폭을 줄이고 계시별 요금제로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누진제가 처음 도입됐을 때와 현 상황이 바뀐 점도 감안해야 한다”며 “저소득층이라도 가구원 수가 많고, 고소득층이라도 가구원 수가 적은 경우도 있어 전기사용량이 꼭 소득과 비례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청원에 올라온 게시글. 전기 누진세 폐지를 요청하는 글에 4만5587명이 동의 의사를 밝히고 있다

◇ 전국에서 누진제 부당 소송 진행...법원 판단은 엇갈려

주택용 전력 소비자들이 한국전력의 전기요금 누진 체계가 부당하다며 제기한 소송도 전국적으로 진행 중이다. 법원의 판단은 현재 엇갈리고 있다.

전력 소비자는 2014년 한전을 상대로 “한전이 위법한 약관을 통해 전기요금을 부당 징수한 만큼 해당 차액을 반환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은 2016년 10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는 누진제 소송과 관련한 첫 판결이다. 해당 사건에 대한 항소심은 올해 1월 진행됐는데, 재판부는 “주택용 누진제 요금규정이 사용자들에게 부당하게 불리하거나 형평에 어긋난 불공정한 약관으로서 무효라 할 수 없다”며 또 다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필요 최소한의 전기사용량 구간에서는 낮은 요금을 책정하고 높은 사용량 구간에서는 높은 요금을 책정한 누진제 방식은 한전의 이익 추구보다는 전기가 한정된 필수공공재라는 점을 고려한 소비 절약의 유도 및 적절한 자원 배분 등 사회 정책적 필요가 주된 목적"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6월 8일 5000명이 한국전력을 상대로 낸 또 다른 전기요금 부당이득 반환 청구 소송에서도 한전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전력 공급의 특수성과 정책적 필요성, 누진제를 도입한 외국 사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약관에서 정한 원가는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난해 6월7일 인천지법은 비슷한 소송에서 "(한전이) 사용자들에게 부당하게 불이익을 줬다. 주택용에만 누진제를 도입해 전기 사용을 억제할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할 만한 합리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다"며 소비자의 손을 들어줬다. 전력 소비자가 승소한 첫 판결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한전의 항소로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선고는 오는 9월 내려진다.

소송에서 전력 소비자를 대리한 곽상언 인강 변호사는 전국에서 소비자 9000여명을 모집해 총 12건의 누진제 관련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곽 변호사는 "전력을 가장 많이 소비하고 있는 10대 대기업의 전기 사용량은 전체 국민이 집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기 사용량과 같다"며 "같은 전기를 사용하면서 전체 국민이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인데, 일부 소수 기업이 (전기요금) 차액만큼 이득을 본다. 가정용 전기요금에만 누진제를 적용하는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