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는 작년 8월 국내 카풀(차량 동승) 스타트업 럭시에 50억원을 투자했다. 작년 초 차량 공유·인공지능(AI) 등 신사업 발굴·투자를 위한 전략기술본부를 출범한 후 첫 국내 투자였다. 현대차는 럭시와 함께 다양한 혁신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작년 말 현대 하이브리드차를 리스(대여) 방식으로 구매한 고객이 카풀을 하면 리스료를 차감해주는 프로그램을 내놨다. 차량 운전자의 운행 패턴과 카풀 탑승객의 이동 경로를 조합해 최적의 차량을 배차해주는 소프트웨어(SW)도 개발했다. 당시 현대차 내부에서는 "로봇 택시와 무인 배달 차량과 같은 혁신 기술 개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현대차는 투자 6개월 만인 올 2월 럭시 지분을 돌연 매각했다. 카풀 서비스에 반대하는 택시 업계의 반발 때문이었다. 현대차의 고객인 택시 업계의 '현대차 불매 운동' 움직임도 큰 부담이었다. 현대차 관계자는 "럭시 대표가 택시 업계의 강력한 압박에 '도저히 견디기 어렵다'며 회사 매각을 결정해 현대차 지분도 같이 넘겼다"고 말했다. 미국 2위 차량 공유업체 리프트의 주요 주주인 GM이 리프트와 함께 갖가지 새로운 실험을 하며 2019년 무인 자동차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는 반면 현대차는 출발부터 제동이 걸린 셈이다.

한국 기업들의 새로운 도전이 사라지고 있다. 전 세계가 빠르게 4차 산업혁명으로 달려가는 상황에서 한국은 신사업을 가로막는 규제, 이해 당사자와 조정 역할에 소극적인 정부, 반(反)기업 정서, 성숙하지 못한 시장 환경 등 다양한 문제들로 기업들이 꽁꽁 묶여 있다.

글로벌 기업 암웨이가 올해 발표한 글로벌 기업가 정신 보고서에서도 한국의 기업가 정신 지수는 39점으로 전체 44개 조사국 중 33위를 차지했다. 글로벌 평균(47점)과 아시아 평균(61점)을 크게 밑돈 수치다.

LG그룹의 IT(정보기술) 서비스 기업인 LG CNS는 한국에서 농업과 기술을 결합한 스마트팜(smart farm) 사업을 시작해 해외 시장에 진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수년째 한국에서 첫 삽도 뜨지 못한 채 농민들로부터 공적 취급을 받고 있다.

LG CNS는 지난 2016년 전북 새만금에 스마트팜 단지를 조성하고 전문 재배사가 수출용 토마토·파프리카를 재배해 전량 수출하려고 했지만 '대기업의 농업 진출은 안 된다'는 농민 단체의 격렬한 반발에 부닥쳐 사업을 접었다.

최근 농림부가 2022년까지 스마트팜 혁신밸리 4곳을 조성하는 사업에 다시 나섰지만 이 역시 일부 농민 단체들의 반발에 직면한 상황이다. 재계 관계자는 "막상 농민 반대에 맞닥뜨리면 정부는 기업이 알아서 갈등을 해결하라며 발을 뺀다"며 "기업들 사이에서는 스마트팜이 트라우마 같은 존재가 됐다"고 했다.

대기업뿐만이 아니다. 서울대에서 자율주행차 연구를 총괄하는 서승우 지능형자동차IT연구센터장(전기정보공학부 교수)은 자율차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수익 모델 단계에서 발목이 잡혀 있다. 서 교수는 "자율차 개발 이후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지만 국내에서는 승차 공유나 셔틀버스와 같은 유료 영업은 전혀 못하게 돼 있다"면서 "지금처럼 도로교통법, 운송사업법에 규제가 겹겹이 막혀있으면 어떻게 신사업에 도전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이런 현실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4차 산업혁명의 주요 기술인 인공지능, 빅데이터·클라우드, 사물인터넷, 3D 프린팅, 지능형 로봇에서 한국은 기술 경쟁국인 미국·유럽·중국·일본에 모두 뒤처진 4~5위로 사실상 경쟁국 가운데서 꼴찌에 머물고 있다.

암웨이의 글로벌 기업가 정신 조사에서도 한국은 작년보다 순위가 10계단이나 떨어지며 조사 대상 44국 가운데 가장 크게 하락했다.

한국 떠나 해외서 신사업 도전

일부 기업들은 규제와 반기업 정서에 밀려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신사업에 도전하고 있다. 국내 양대 포털업체인 네이버와 카카오 모두 일본에서 블록체인 사업을 진행 중이다.

카카오는 지난 3월 블록체인 자회사 '그라운드X'를 일본에 설립했다. 카카오는 "아시아 시장을 겨냥했기 때문에 해외를 택했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지만, 업계에서는 가상 화폐 발행(ICO)을 금지한 한국 대신 규제가 유연한 일본을 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네이버도 일본의 자회사 라인을 통해 블록체인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상태다. 지난 1월 일본에 블록체인 기반의 금융사 '라인 파이낸셜'을 설립했고 연내에 자체 가상 화폐를 발행할 계획이다. 이달 중순에는 싱가포르에 가상 화폐 거래소 '비트박스'도 열었다.

벤처업계 관계자는 "한국에서 네이버와 카카오가 가상 화폐 관련 사업을 하면 검찰 수사를 받거나 국회에 불려다니느라 날이 샐 것"이라며 "한국에서 손톱만큼이라도 논란이 될 만한 신사업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두나무 등 국내 주요 가상 화폐 거래소는 줄줄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서강대 박수용 교수(컴퓨터공학과)는 작년 말 연구실에서 개발한 블록체인 기술을 들고 미국 실리콘밸리로 향했다. 벤처 투자자들에게 기술을 알리고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도 여러 투자자들을 만났지만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은 달랐다.

박 교수는 "투자 위험, 출구전략을 집중적으로 묻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선 독창적인 기술 그 자체에 관심을 보였고 심지어 새로운 기술 아이디어와 비즈니스까지 제안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의 비즈니스 제안 중에는 한국에서는 가상 화폐 발행 등 규제 때문에 불가능한 것도 여럿 있었다.

박 교수가 난색을 표하자 미국 투자자들은 "아예 회사를 미국에 설립하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박 교수는 "고민 끝에 일단 한국에서 시작하기로 했다"면서도 "세계 시장에서 꿈을 펼치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게 아니라 규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외 진출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