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5일 오후 3시 11분. 서울 여의도를 비롯해 전국 212만가구가 한꺼번에 전기가 나갔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갇혔고 사무실 컴퓨터는 갑자기 꺼졌다. 양식장에선 물고기 수백만마리가 죽었다. 9월 중순이었지만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예비 전력이 300만㎾대까지 떨어지자 전력거래소가 일부 지역 강제 단전(斷電)에 나선 것이다. 전국적인 '블랙아웃(대정전)'을 막기 위해서였지만 아무런 사전 예고나 경고는 없었다. 당시 정전 사태는 전력 당국의 안이한 대응과 주먹구구식 전력 예측, 무시된 매뉴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최근 폭염 속에 전력 수요가 연일 사상 최대를 경신하지만 여전히 수요 예측 실패, 비상시 위기 대응 방식 등 전력 관리에 허점이 드러나고 있다.
◇전력 수급 전망 틀려도 너무 틀려
지난 24일 최대 전력은 오후 5시쯤 9248만㎾까지 치솟았다. 사상 최대였다. 정부가 작년 말 내놓은 8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에서 예상한 올여름 최대 전력 수요(8750만㎾)보다 498만㎾를 초과했다. 7월 들어 무더위로 전력 수요가 가파르게 증가하자 정부가 지난 5일 최대 전력을 재조정해 내놓은 8830만㎾보다도 418만㎾가 많은 것이다. 원전 4기를 돌려야 만들 수 있는 전력이다.
하루하루 최대 전력 전망도 엉터리다. 전력거래소의 7월 셋째 주(13~20일) 최대 전력 예측과 실제 수요 간 오차 범위는 80만~458만㎾였다. 8일 가운데 다섯 차례나 최대 전력을 200만㎾ 넘게 낮춰 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전날 사상 최대를 기록하자 화들짝 놀란 전력거래소는 25일엔 9300㎾로 높였지만 260만㎾ 과도하게 예상했다.
전문가들은 기록적인 폭염 탓에 전력 수요 예측이 틀릴 수 있지만, 매번 수백만㎾씩 빗나가는 것은 전력 당국의 역량과 신뢰에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노동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폭염처럼 기상 이변이 상수가 됐는데도 과거와 같은 기준의 날씨를 가정해 전력 수요를 예측하니 빗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9·15 정전 사태' 역시 전력 수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탓이었다. 당시 추석 연휴가 끝난 9월 중순이었지만 더운 날씨 탓에 전력 수요는 급증했고, 예비 전력이 343만㎾까지 떨어지자 전력 당국이 강제 단전에 나선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전력 전문가는 "정부는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내려가 전력 수요도 낮췄다고 하지만 들여다보면 경제성장률 하향치보다 전력 수요를 더 낮춰 잡은 것 같다"며 "전력 당국 실무진의 역량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위기 경보 발령 기준 10년 넘게 '예비 전력 400만㎾'
전력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 전력 당국은 매뉴얼에 따라 위기 경보를 발령하고 조치에 들어간다. 300만㎾ 미만 '주의(블루)', 200만㎾ 미만 '경계(옐로)', 100만㎾ 미만 '심각(레드)' 3단계이던 것을 2005년 전력 시장 운영 규칙을 바꿔 400만㎾ 미만 '관심(블루)' 단계를 추가했다. 9·15 정전 사태 이후엔 500만㎾ 아래로 떨어질 경우 '준비' 단계를 추가했다. 이는 위기 경보가 아닌 사전 준비 성격이다.
9·15 정전 사태가 난 2011년 당시 최대 전력은 6000만~7000만㎾ 수준이었다. 7년이 지난 지금은 1억㎾에 육박한다. 그런데도 전력 수급 위기 경보 발령은 10년 전 만들어진 400만㎾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발전공기업 전(前) 사장은 "전력 수요 자체가 크게 늘어 200만~300만㎾가 증가하는 건 순식간인데 위기 경보 기준을 지금도 400만㎾로 고정해 놓은 건 문제"라며 "전력 수요와 변동성이 커진 만큼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산업부 관계자는 "기준을 높이면 안심은 되지만 비용이 늘게 된다"며 "400만㎾면 위기 대응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기를 전공한 사립대 교수는 "우리 전력망은 전국 단위로 연결되어 있어 대정전이 발생하면 피해는 가늠조차 어렵다"며 "비용이 더 들더라도 기준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수요 감축 요청 조건 됐는데…
수요 감축 요청(DR)은 최대 전력 예상치(8830만㎾)를 초과하고, 공급 예비력이 1000만㎾를 밑돌 것으로 예상되면 시행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최대 전력 수요에 맞춰 설비 용량을 한없이 늘리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수요가 몰릴 때 기업에 절전을 요청해 수요를 줄이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최대 전력이 가장 높았던 지난 24일은 실시 요건이 됐는데도 전력 당국은 시행하지 않았다. 휴가를 앞둔 기업에 부담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9·15 정전 사태는 매뉴얼에 따른 위기 대응 실패가 원인이었다. 당시 산업부 담당 과장 방 모니터에 표시된 전력 공급 능력은 전력 생산을 못 하는 발전기까지 예비 전력에 포함하고 있었다. 예비 전력 감소 단계별로 취해야 할 매뉴얼도 지켜지지 않았다. 전력 관리 체제가 엉망이었던 것이다.
산업부 출신 전직 공무원은 "정부가 탈원전 탓에 전력이 부족해졌다는 비판이 두려워 DR을 시행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