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지난 7월 18일(현지시각) 반독점법을 어겼다며 구글에 대해 벌금 50억달러(43억4000만유로·한화 5조6500억원 상당)를 부과했다. 반독점에 혐의를 받은 기업에 대한 사상 최대 벌금이다.

구글은 "기술 혁신을 죽이고 소비자 부담을 늘릴 것"이라며 항소 방침을 밝혔지만 마이크로소프트 등 경쟁 기업들은 "정당한 결정"이라고 환영했다.

유럽과 한바탕 무역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공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유럽연합의 벌금 부과를 강력 비난, 미국과 유럽간 무역 전쟁의 도화선이 될 조짐도 있다.

전문가들은 천문학적인 벌금 액수 보다 유럽연합의 결정이 앞으로 각국의 규제 등 정책 변화에 줄 영향에 더 주목한다.

페이스북의 ‘데이터 스캔들’ 등을 계기로 세계 각국에서 실리콘밸리 기술 기업들에 대한 규제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미국과 유럽의 무역 갈등이란 만만치 않은 변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이 구글에 과징금 50억달러를 부과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강하게 반발했다. 베스타게르 유럽 경쟁담당 집행위원이 “구글은 경쟁자들의 혁신 기회를 막았다. 이는 법 위반"이라고 밝힌 지 하루 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유럽연합)이 미국을 이용하고 있다.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는 트윗을 날렸다.

◆ 구글 2년간 벌금 77억달러··· "세번째 반독점법 위반 혐의 조사중"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 EU 경쟁담당 집행위원은 "구글이 인터넷 검색의 시장 지배력을 시멘트처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안드로이드 체계를 불법적으로 이용했다"고 밝혔다.

구글이 자사 검색 엔진과 크롬 앱 등을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에 끼워 팔아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했고 기기 제조사와 모바일 네트워크 운영자들에게 자사 앱 설치 대가로 인센티브를 지급한 혐의가 밝혀졌다고 EU 반독점 경쟁위원회는 밝혔다.

EU는 구글이 90일 내에 반경쟁적 관행을 중단하지 않으면 알파벳의 세계 하루 평균 매출액의 5%에 달하는 벌금을 추가로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2013년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등이 가입된 로비 단체 ‘페어워치' 등이 구글의 반독점법 위반 의혹을 제기한지 5년 만에 내린 결정이다.

EU는 2017년에도 광고 검색 결과를 조작, 경쟁을 제한한 혐의로 구글에 대해 벌금 27억달러(24억2000만유로)를 부과했다. 당시까지 반독점법 위반 기업에 부과된 사상 최대 벌금이었다.

구글에 대한 EU의 반독점 공세는 현재 진행형이다.

EU는 현재 구글의 온라인 광고인 애드센스 계약과 관련, 또다른 독점법 위반 여부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 사건 조사 결과에 따라 구글의 벌금 규모는 다시 천문학적 액수로 불어날 가능성이 있다.

선다 피차이 구글 CEO는 유럽연합의 벌금 부과에 대해 “안드로이드 생태계가 위협 받고 있다"고 반발했다.

◆ EU의 반독점법 공격에 실리콘밸리 기업들 초토화

구글 뿐 아니라 내노라하는 미국의 기술 기업치고 유럽연합의 ‘벌금 폭탄’을 피한 기업은 많지 않다.

소셜 미디어 기업인 페이스북은 2017년 왓츠앱 인수 과정에서 소비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1억1000만유로의 벌금을 부과당했다.

‘반도체칩 제국’ 인텔은 부당 리베이트 제공으로 경쟁을 제한했다는 혐의로 2009년 벌금 10억6000만유로를 부과받았다.

퀄컴은 애플에 자사 칩을 독점 공급하면서 보조금을 지급한 혐의로 20억달러에 달하는 벌금을 징수당할 위기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터넷 브라우저 ‘익스플로러 끼워팔기’ 등 MS윈도를 이용한 경쟁 제한 혐의로 두 차례(2008년·8억990만유로, 2013년·5억8100만유로)에 걸쳐 벌금을 부과 당했다.

애플은 2016년 아일랜드로부터 불법으로 감면받은 세금 145억달러(130억유로)를 내라는 EU 집행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감면받은 세금을 전액 납부해야 했다.

에어비앤비, 우버 등도 소비자 보호 규정 위반 등의 혐의로 유럽연합의 조사를 받고 있다.

지난 5월 발효된 유럽연합의 '일반 정보 보호 규정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에 따라 유럽에서 사업하는 글로벌 기술 기업들은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벌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00년대 들어 유럽연합으로부터 30억달러에 달하는 벌금을 두드려 맞았다. 빌 게이츠는 미국 정부가 1998년 ‘익스플로어 끼워팔기’에 대해 반독점 소송을 제기하고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2000년 최고 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훗날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못이뤘다"고 고백했다.

◆ 실리콘밸리, 국제 무역 갈등 고조 속 자국내 규제 움직임 촉각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연합이 미국을 이용하고 있다"며 유럽연합의 벌금 부과 결정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미국 행정부의 품에 의지할 처지는 아니다.

현재는 탄탄한 실적이 받쳐주고 있지만 기술 기업들에 대한 미국 행정부와 의회의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 속에 무차별 무역 전쟁 변수가 더해져 셈법이 오히려 복잡해지고 있다.

작심하고 달려드는 유럽연합의 규제 공세가 강화되는 추세인데다 자동차, 철강 등 제조업 강세인 미국 동부, 자영업자 등 중산층을 핵심 지지층으로 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실리콘밸리 기술 기업들 사이에는 갈등의 골이 깊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애플, 구글 등 글로벌 기술 기업들을 겨냥, "돈은 미국에서 벌면서 세금과 일자리는 다른 나라에 갖다 바친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최근에는 온라인 유통기업 아마존을 겨냥, "미국 우편 인프라를 값싸게 이용하면서 자영업자들의 이익을 다 빨아 먹고 있다"며 아마존 상품의 배달 요금을 확 올리라고 우정청장에게 지시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 사이에도 ‘친민주당, 반공화당’ 정서가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공화당 지지자임을 고백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다.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기업인 수백명은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 당선 반대를 선언하고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선거 자금을 몰아줬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이민법 개정, 총기 규제, 기후 협약 탈퇴 등 핵심 정책에 대해 사사건건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6월 ‘망중립성 원칙’을 폐기, "실리콘밸리 기술 기업들이 미국의 통신 인프라에 무임승차하고 있다"는 거대 통신사들의 오랜 소원을 들어줬다.

공화당이 지배하는 의회도 페이스북의 이용자 데이터가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에 사용됐다는 ‘데이터 스캔들'과 관련,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를 증언대에 세우는 등 실리콘밸리 기업들에 대한 규제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01년 닷컴 버블 붕괴 이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잘나가던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규제 강화라는 안팎의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