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현지 시각) 싱가포르 중부에 있는 '앙 모 키오 리니어 공원'은 오는 9월 완공을 앞두고 공사가 한창이었다. 싱가포르 국토청의 공무원들은 이 공원을 짓기 전인 지난 2월 이미 가상현실(VR)로 공원이 어떤 모습으로 지어질지 모든 시뮬레이션을 마쳤다. 싱가포르 국토를 3차원(3D)으로 본뜬 '가상 싱가포르(Virtual Singapore)'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컴퓨터 모니터 속에 나타난 가상 공원에 '눈(eye)' 모양 버튼을 클릭하자 인근에서 바라본 공원의 풍경이 보였다. '그림자' 모양 버튼을 누르자 시간대마다 공원 시설물의 그늘이 어떤 방향으로 드리우는지가 나타났다. 공원 주변 지역의 유동 인구는 규모에 따라 색깔별로 표시됐다.

공무원들은 주변 아파트 단지의 시야를 가리는 나무를 설계도에서 지우고, 놀이터는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겼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는 벤치를 늘렸다. 이 사업에 참여한 추친이 싱가포르 국토청 지리공간시스템 부팀장은 "가상현실에서 도시를 꾸미려면 컴퓨터 천재쯤 돼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페이스북을 쓸 줄 아는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도시를 통째로 옮긴 '가상 싱가포르'

싱가포르는 올 초 '가상 싱가포르'라는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프랑스 기술기업 다쏘시스템이 개발한 3D 프로그램에 싱가포르 전 국토(697㎢)를 가상현실로 구현하는 사업이다. 드론·인공위성·센서를 동원해 얻은 정보에 정부가 축적해둔 도시의 데이터를 입혔다. 지난 2015년부터 프로젝트를 시작해 총 7300만달러(815억원)를 투자했다.

10일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호텔에서 싱가포르 국토청 관계자가 가상현실(VR)로 구현된 ‘가상 싱가포르’를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가상 싱가포르는 인터넷으로 '구글 지도' 접속하듯이 주소를 입력하고 로그인하면 들어갈 수 있다. 이 시스템 안에는 건물 한 채, 나무 한 그루까지 현실 세계가 똑같이 구현돼 있다. 변성준 다쏘시스템코리아 이사는 "가상 세계에 싱가포르라는 나라를 통째로 복제해서 옮겼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가상 싱가포르의 특징은 현실 세계의 모든 일을 예측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공무원들은 교통 체증, 도심 풍향(風向), 인파 흐름 등 각종 변화를 시뮬레이션해보고 맞춤 행정을 펼치면 된다.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국토청은 지난 4월 현지답사 없이 동부지역의 주민센터 건립 부지를 골랐다. 가상 세계에서 몇 주간 6개의 국유지를 비교한 결과 저층 건물이 들어서기 적합하고, 가족 단위 거주자들이 도보로 10분 이내에 닿기 좋은 곳을 낙점한 것이다. 싱가포르 정부에서는 이제 서로 다른 부처 공무원들이 온라인 게임에 접속하듯 한 화면을 보며 협업(協業)한다. 공유 버튼 한 번만 누르면 원하는 부처의 공무원에게 접속 권한을 줄 수 있다. 버나드 샬레 다쏘시스템 부회장은 "가상 싱가포르는 정부 공무원들이 같은 곳을 보고 노를 저을 수 있게 만들었다"고 했다.

◇전 세계로 확대되는 가상 도시

가상 싱가포르의 핵심은 정확한 데이터다. 싱가포르는 2015년부터 2년간 전국의 초·중학교 학생을 동원해 도시의 정밀 데이터를 수집했다. 196개 학교 5만여명의 학생이 매일 소형 카메라 크기의 센서를 4~8주간 목에 걸고 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학생들의 동선(動線)에 따라 각 지역의 밝기, 움직임, 소음, 습도 등이 세세하게 기록됐다. 센서에는 별도의 스위치가 달려 있어 학생들이 기분 좋을 때는 눌러서 '이곳에서 좋은 기분이 들었다'는 표시도 하게 했다.

이렇게 축적한 데이터를 도시 모형 위에 얇은 막처럼 차곡차곡 입히는 것이다. 지형의 높낮이, 범죄 발생 구역, 학생들이 기분 좋았던 곳, 버스 노선과 같은 정보들이 각각의 층(層)이 된다. 도시 모형 위에 '지형 높낮이'와 '교통사고 구역' 정보만 입히면 두 데이터 간 상관관계를 손쉽게 알아볼 수 있다. 가상 싱가포르는 2년마다 정보를 대규모로 업데이트한다.

가상 도시 바람은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빠당 빠리아만시(市)는 9일 다쏘시스템과 협약을 맺고 가상 도시를 구현하기로 했다. 중국 남서쪽 구이저우성 구이양시는 이 프로그램을 활용해 2020년까지 1만㎞가 넘는 고속도로와 4000㎞가 넘는 철길을 설치한다.

한국은 2008년 전후로 스마트시티 조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현실 세계의 투자에 집중할 뿐 이 같은 소프트웨어 차원의 시도는 아직 부족한 상황이다. 톈예 중국과학원컴퓨터네트워크정보센터 연구원은 "눈에 보이는 한국 도시의 모습은 첨단을 달리지만 과연 소프트웨어 면에서도 스마트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