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씨티은행 전국 44개 영업점에선 오후 5시 30분이 되면 모든 PC가 강제로 꺼진다. 직원들은 일을 하고 싶어도 PC가 꺼져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고, 퇴근해야 한다. 이 회사는 작년 12월부터 점심시간 1시간을 빼고 하루 7시간, 한 주간 35시간 근무제를 운영 중이다.
제도를 도입할 때 회사 내에선 과연 업무가 제대로 될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자체 평가 결과 이 제도는 아직까지 별문제 없이 운영되고 있다. 엄경식 한국씨티은행 본부장은 "직원들이 업무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적인 시간을 줄이거나 회의시간 등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과거와 같은 양의 업무를 더 적은 시간안에 처리하고 있다"며 "생산성이 향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금융권은 이달부터 시행된 주 52시간 근무제를 1년간 유예받았다. 그러나 제도의 조기 도입을 위해 미리 움직이는 회사가 적지 않다. 이는 법이 강제 시행되기 전에 시범 운영을 통해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PC 온오프(On-Off)제'·'유연근무제'로 52시간 근무 유도
삼성화재는 오후 6시 30분에 PC가 일괄적으로 꺼지는 '홈런(Home Run·집으로 달려가자) 시스템'을 이달부터 전격 시행했다. 이 회사는 PC가 켜지는 시간도 오전 8시로 정해 놓아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업무를 줄이고 있다. KEB하나은행은 저녁 7시가 되면 본점의 PC뿐 아니라 조명까지 모두 소등된다. 꼭 야근해야 하는 직원들은 별도로 마련된 집중 근무층에서 잔무를 처리한다. DB손해보험·KB손해보험 등도 이와 유사한 PC 온오프제를 도입 운영 중이다.
자율적으로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유연근무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롯데카드는 오전 8시~10시 사이 30분 단위로 직원들이 출근 시간을 정할 수 있게 했다. 대신 하루 8시간, 한 주 40시간 근무시간만 채우면 된다. 우리은행·현대카드·KB국민은행·SC제일은행 등도 유연근무제를 시행해 워킹맘과 먼 거리 출퇴근자들 중심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 한 보험사 직원은 "고질적인 야근이 많이 사라졌고, 일할 때 일하고 저녁엔 자기 계발 등을 할 수 있게 돼 직장 만족도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해외 거래·24시간 CD기 관리 등은 예외 적용 필요
그러나 글로벌 금융시장과 연계돼 근무가 이뤄지는 금융사의 성격상 주 52시간 도입이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한 외국계 은행 한국 지점 대표는 "한국에서 주 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한다고 하자 유럽 본사에서 '그럼 시도 때도 없이 열리는 글로벌 실시간 회의를 어떻게 대처할 수 있냐'고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다른 외국계 은행 한국 법인장은 "미국에선 근무시간을 일률적으로 강제하기보다 연봉의 차등을 통해 연장 근무를 보상한다"고 말했다. 국내 시중은행들도 현금입출금기(CD기) 24시간 관리, 공항 지점 24시간 교대 근무 등 주 52시간 근무를 지키기 쉽지 않은 분야를 어떻게 조율해 나갈지 노사 간에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